#1. "A경찰서인데요,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소돼 조사받으셔야 되겠습니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정현 씨(가명ㆍ23)는 지난 10일 오전 출근길에 경찰 전화를 받았다. 김씨는 생전 처음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터라 무척 당황했다.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되물었더니 두 달 전 김씨가 블로그에 올렸던 음악 파일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경찰은 고소인의 연락처라며 S법무법인 사무실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김씨는 할 수 없이 다음날 아침 법무법인 사무실에 전화했더니 여직원이 다짜고짜 합의금 100만원을 계좌에 입금하라고 했다.
#2. 며칠 전 서울 소재 한 경찰서는 '저작권 고소장 폭탄'을 맞았다. 모 법무법인에서 우편으로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고소장을 보냈는데 이를 뜯어 보니 고소 대상자가 무려 100명에 달했던 것. 이로 인해 이 경찰서 사이버수사팀은 꼬박 이틀간 일일이 신원을 확인하고 조서 작성에 매달리느라 다른 업무는 손도 대지 못했다.
경찰 관계자는 "고소된 이들 중 상당수가 위반 행위를 인지하지 못한 학생들"이라며 "법을 어겼으므로 경찰로서는 엄정하게 법 집행을 하고 있지만 수임 경쟁에 밀린 변호사들이 돈벌이에 혈안이 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씁쓸해 했다.
경미한 저작권 위반을 빌미로 변호사들이 네티즌에게 거액의 합의금을 요구하는 사건이 급증하고 있다. 소설ㆍ영화ㆍ음악 저작권자에게서 대리 위임을 받은 변호사들이 저작권법 위반으로 네티즌을 마구잡이로 고소하기 때문이다. 서울 소재 한 경찰서에 도착한 고소장을 본지가 직접 확인한 결과, 문제의 법률사무소 고소장은 기계에서 찍어내듯이 졸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고소장을 제출한 법무법인은 살지도 않는 고소인 주소를 살짝 옮겨놓은 뒤 피고소인 아이디만 '붙여넣기'해서 수백 장의 고소장을 공산품처럼 찍어냈다. 고소장의 고소 사실과 내용은 모조리 똑같다.
지난해부터 많게는 한 경찰서에 접수되는 저작권 고소 건수가 한 달 평균 500~600건에 이를 정도로 급증하면서 일선 경찰서는 업무 과중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16일 경찰과 변호사 업계에 따르면 문제의 변호사들은 인터넷 개인 블로그나 카페 등을 검색하면 쉽게 불법 복제 사례를 찾을 수 있고 P2P 사이트에서 불법 업로더를 실시간으로 잡아낼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고 있다. 변호사들은 아예 불법 복제 사례를 전문적으로 찾아내는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종일 모니터링한다.
이들의 그물망에 걸린 피고소인들은 저작물을 대량으로 불법 유통하는 '헤비 업로더'가 아니라 대부분 대학생이나 청소년이기 때문에 '형사처벌' 얘기만 꺼내면 깜짝 놀라서 허겁지겁 변호사들에게 합의금을 건넨다.
현재 합의금 수준은 저작권 고소를 전문으로 하는 몇몇 법무법인에서 주도해 △중ㆍ고생 60만원 △대학생 80만원 △직장인 100만원으로 통용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전남 담양에서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소를 당한 고등학생이 괴로운 나머지 자살을 한 사건까지 발생했지만 고소 건수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사실 이같이 경미한 저작권법 위반은 합의금을 내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형사처벌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합의금을 내지 못해 결국 검찰에 기소된 네티즌이 많지만 죄가 중한 경우를 빼면 대체로 기소유예로 끝난다. 황철규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장은 "검찰 내부에서 저작권 위반 사범을 처리하는 가이드라인이 있다"며 "범죄 정도가 경미하거나 청소년ㆍ초범인 경우 기소유예를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청소년은 이 같은 법률 상식을 제대로 모르거나 진짜 처벌을 받을까 무서워 거액의 합의금을 내고 있다. 영화 한두 편 내려받은 청소년에게까지도 법무법인이 현행법을 들이대며 악용하고 있는 셈.
이로 인해 저작권법이 변호사들의 배만 불리는 법이라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지만 마땅한 대책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황 부장검사는 "법무부와 검찰에서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여러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법 제도 개선에 많은 시일이 걸린다"고 말했다. 다만 전과자 양산을 줄이기 위해 형사처벌을 최소화하고 대신 민사 손해배상 소송으로 적극 돌리는 쪽으로 얘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안상돈 대검찰청 형사1과장도 "입법론적인 측면에서 형사처벌 대상을 제한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며 "저작권 침해 정도가 일정 금액을 넘는 경우라든가 헤비 업로더처럼 영리 목적이 있었을 경우 등으로 대상을 특정하면 모르고 실수한 네티즌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네티즌 사이에서도 법무법인이 거액의 합의금을 요구하는 비상식적인 처사에 대해 문제를 인식하고 현행 60만~100만원 정도의 합의금을 현실적으로 조정해 경미한 범죄는 10만원 정도로 낮추자는 의견을 올리고 있다.
이에 박찬훈 법률사무소강호 변호사는 "경미한 저작권 위반 사범이라면 경고만으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므로 저작권자 측에서 이들에 대해 경고ㆍ각서 단계를 거치고 난 뒤 재범한 경우에 형사처벌이나 고소 취하를 보상할 만한 합의금 단계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임태우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매일경제 구독] [주소창에 '
경제'를 치면 매경 뉴스가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