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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이태리.스위스)

카타꼼베(Catacombe)

 

  카타꼼베(Catacombe)

그리스도 교도들이 숨어 지냈던 지하무덤 카타꼼베(Catacombe)

로마인의 지하 무덤으로 기독교 공인 전에 그리스도 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지하 교회나 무덤를 카타꼼베라고 부른다. 이 장소는 16-19C에 걸쳐 재발견되었으며, 귀족 가문의 소유였던 지하 매장실로부터 여러 층으로 된 긴 복도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카타꼼베 중 로마 부근의 것은 지하통로의 길이가 500㎞이상 되기도 한다. 또한 카타꼼베에는 원시 기독교 예술의 귀중한 재산이 되고 있는 조각, 그림, 형상들이 새겨져 있다. 아피아 거리에 있는 성 칼리스토의 카타꼼베가 가장 유명하다. 로마의 남쪽에는 45개의 지하 공동묘지가 있다. 당시 신자들은 예수와 같이 돌을 파서 만든 지하 무덤에 묻히길 원했으며 대부분 빈민이나 노예이어서 돈이 많이 드는 지상의 영묘를 수도 없었다. 따라서 지하에 커다란 공동묘지가 생기게 것이다. 또한 로마법에 따라 묘지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져 함부로 침범할 없었기 때문에 로마군의 박해를 피해 곳에 복잡한 미로를 만들고 성당을 마련해 종교의식을 행할 있었다고 한다. 까따꼼베는 길이만 해도 총연장 900km 달하며 300년간 600만명이 묻힌 거대한 규모이다. 지금 공개되어 있는 것은 전체 유적의 극히 일부이며 깔리스또San Calisto 까따꼼베와 세바스띠아노San Sebastiano 까따꼼베가 가장 유명하다. 이번에 우리가 방문한 깔리스또 까따꼼베는 3세기경부터 그리스도 교인들의 공식적인 묘지가 되었으며 현재 가장 보존이 곳이다. 교황도 9명이나 이곳에 묻혔으며 교황 순교자 깔리스뚜스가 이곳에 묻혀 그의 이름을 따게 되었다. 세바스띠아노 까따꼼베는 258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베드로와 바오로의 유해를 임시로 보존했던 곳이다. 이곳에 묻혀있는 세바스띠안은 원래 로마군 장교였는데 신앙을 가진 박해 당하여 온몸에 화살을 맞고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몸에 박혔던 화살이 보존되어 있다.

1578 5 31일에 살라리아 도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포도밭에서 작업하고 있을 땅이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그곳은 그림들과 그리스, 라틴어 명문들로 장식된 지하무덤 위였다. 그곳에서는 석관들도 발견되었다. 처음으로 이루어진 발굴은 스파니아르드 알폰소 차코니오가 주도했다. 발굴현장에는 수천 명의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차코니오는 찾아낸 그림들을 모사 하게 했지만 발굴 작업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년이 지난 뒤에 학자인 안토니오 보시오가 이것을 완전히 발굴해 냈다.  1593년에 보시오가 처음으로 아르데아티나 도로에 있는 도미틸라의 카타콤베에 들어갔을 , 그는 겨우 18세였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신비와 침묵에 끌려 땅속 깊은 곳까지 넓게 펼쳐진 미로 속으로 용감하게 걸어 들어갔다. 신성한 터널들은 사방으로 뻗은 길다랗고 좁은 틈들로 이뤄져 있었다. 방문객들은 벽에 반사된 촛불에 비친 모습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갑자기 그들은 자신들이 완전한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죽을 것이라고 확신한 그들은 신성하고 감히 범접할 없는 장소가 자신들의 시체로 더럽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쳤다. 그들은 거의 48시간 동안을 더듬거리며 헤매다가 마침내 출구를 발견했다. 그들은 앞으로는 양초를 충분히 준비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런 탐험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경험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보시오의 헌신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시간을 카타콤베 발굴에 바쳤고, 모든 카타콤들과 거기에서 발견한 그림들을 위대한 저서 '지하로마' 기록했다. 지지학적인 배열, 발굴물들 간의 끊임없는 비교, 원본과 명문들, 모든 것은 기독교 고고학 발전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보시오는 비판적 방법이 결여된 16세기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죽고 나서야 출간된, 로마의 모습을 마치 신성한 묘지처럼 묘사한 그의 책이 불러일으켰을 흥분을 상상해 있다보시오의 저작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가 이용했고, 마찬가지로 교회가 초기 기독교인의 신앙과 예배의식에 충실한가 그렇지 못한가를 둘러싼 논쟁에도 이용되었다. 카타콤베의 발견으로 그때까지 오직 문헌에만 근거를 두고 있었던 논쟁에 불이 붙었다.

 

 

 

 

 

 

 

 

 

 

 

 

 

 

 

 

 

 

 

 이 분이 순교하신 황제의 딸 체칠리아. 이 시기의 처형은 이처럼 지체가 높은 사람은 목을 칼로 세번 내리쳐 죽이는 사형 벌과
지체가 낮은 사람에게 내리는 십자가형이 있었다고 한다. 체칠리아는 세번의 참수에도 목이 잘리지 않았다고 한다. 시신을 밀납으로 보존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로마 황궁 터

 

 

까타콤베 가는 길 옛 로마길이라고 함.

 

 

 

쿼바디스 레스토랑. 이곳 가까운 곳에 쿼바디스 성당이 있다.

 

 

 

 

박물관과 베드로 대성전 순례를 마친 후 원래 중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었는데, 일정을 바꾸어 이태리 정식으로 점심 식사를 바꾸었다. 이태리 중국식이 그렇게 맛있는 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이태리 정식이 낫다.

점심을 먹었던 식당.식당 이름이 "쿼바디스 레스토랑"이다.

 

 

 

 

점심을 먹은 후 세바스챤 카타콤베 순례를 한다.

 

 

 

 

 

 

 

 

 

 

 

 

 

 

 

 

 

 

 

 

 

 

 

 

 

 

 

 

 

 

 

 

 

 

 

 

 

 

 

 

 

 

 

 

 

 

 

 

 

 

 

 

 

 

 

 

 

 

 

 

 

 

 

 

 

 

 

 

 

 

 

 

 

 

 

 

 

 

 

 

 

 

 

 

 

 

 

 

 

 

 

 

 

 

 

 

 

 

 

 

 

 

 

 

 

 카타콤베 지상 예배당    (이하 사진 출처- http://pie.daum.net/p530277

 

 

 

카타콤베 지하 무덤들      (이하 사진 출처- http://pie.daum.net/p530277

 

양쪽에 보이는 홈은 모두 무덤이다.  규모에 따라 어른과 아이로 구분할 수 있는데 지상에서 태어나 지하로 들어온 어른보다는 지하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병으로 쉽게 죽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수백년동안 사람이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또 죽으며 산자와 죽은자는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구조는 지하 10∼15m의 깊이에 대체로 폭 1m 미만, 높이 2m 정도의 통랑(通廊)을 종횡으로 뚫어 계단을 만들어서 여러 층으로 이어져 있다. 또한 통랑의 곳곳은 넓은 방처럼 되어 지도자급 교도의 묘실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통랑의 벽면(壁面)에도 시체를 두는 벽감(壁龕)을 일정한 규칙으로 설치하였다

 

 

 

 

 

  (이하 사진 출처- http://pie.daum.net/p530277

 

 

  (이하 사진 출처- http://pie.daum.net/p530277

 

 

<귀한 사진들-  이하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

 

(이하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

 

(이하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

(이하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

 

 

 

칼리스토의 카타콤베 >

 

칼리스토의 카타콤베           (이하 출처- http://blog.empas.com/andrepark)

 

로마 초대 기독교인들의 가장 오래 된 곳이다. 화산암 지대로 지하로 30m 파내려 갔으며 총 연장 20km나 되는 복잡한 통로로 되어 있다. 3세기때의 교황들의 묘비가 있고 수많은 신자들의 쉬었던 자리가 통로 양쪽에 있다.

 

 카타콤베로 가는길

 

 카타콤베 내부

 

 산타 체칠리아 성녀가 묻혀 있던 무덤.  (이하 출처- http://blog.empas.com/andrepark)

 

체칠리아 성녀의 순교한 모습   (이하 출처- http://blog.empas.com/andrepark)

 

산타 체칠리아의 관은 831년에 교황 파스 쿠알레1세의 명으로 트라스 테베레 지역에있는 산타 체칠리아 성당으로 이전 되었다. 순교한 모습을 대리석상으로 재현 하였는데 손가락으로 삼위일체를 표시한체 고개를 벽쪽으로 돌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목의 칼자국은 선명하다. 16세기초에 산타 체칠리아의 관을 열었을때 성녀의 유해는 천년이상 지났는데도 부패되지도 않고 순교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체칠리아 성녀는 음악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무덤위에 그려진 요나의모습

 

물고기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착한 목자상   (이하 출처- http://blog.empas.com/andrepark)

 

 예수그리도를 표현한 뚜껑에 새겨진 글씨

 

예수그리스도   (이하 출처- http://blog.empas.com/andrepark)

 

 천국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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