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악산직지사(黃岳山直指寺)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사적비(寺蹟碑)가 허물어져 그 역사적 근거는 찾을 수가 없으며,
418년(눌지왕 2)년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묵호자(墨胡子)가 창건하였다 전하고 있다.
절의 명칭 또한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황악산의 깊은 계곡을 가리키며
거대한 사찰이 자리 잡을 곳이라 예언한데서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라 하여
직지(直指)라는 명칭을 지닌 사찰이라는 설과
능여가 절터를 잴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한 데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지만
어느 것이 정설인지는 알 수가 없다.
임진왜란 당시 일주문을 제외하고 모두 전소되었던 사찰은
삼국시대의 본래 모습은 찾기 힘들지만 대웅전 삼존불의 뒤에 걸린 삼존불탱화와
약사전의 석조약불좌상 등 수많은 보물과 성보박물관을 갖추고있고
조계종 제8교구 본사답게 인근에서 유물을 가져와 대가람다운 사찰이 되었다
천 년 묵은 칡나무와 싸리나무로 한 기둥씩 만들었다는 일주문
대양문 일반적으로 주 법당에 도달하기 전에
거쳐야할 사찰의 문은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나
직지사에는 일주문과 금강문 사이에 대양문이 있는데
대양이란 부처님의 큰 광명을 상징하며 녹원화상에 의해신축되었다.
대웅전 앞 동·서석탑(보물 제606호)은
원래 경북 문경 도천사지에서 옮겨 놓은 것으로 2기는 대웅전 앞에 1기는 비로전 앞에 있다
대웅전(보물 제1576호) 삼존불의 뒤에 걸린 삼존불탱화
사명각
사명대사가 임란이 끝난 후에 일본에 끌려간 조선의 포로를 구하기 위해 일본에 건어 갔을 때
사명대사의 도력을 시험하기 위해 그를 맞이하는 길가에 병풍을 세워놓고
만약 그가 한자라도 틀리면 죽일 구실을 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한자도 틀리지 않고 줄줄,,,,,,그는 사명대사였다
비로전은
천불을 모셨다고 하여 천불전(千佛殿)이라고도 하는데
직지사는 이 비로전으로 인해 영험스런 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53평의 넓은 법당에는 고려 태조 때 조성한 천불상이 모셔져 있다
천불상의 모습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한결같이 자비스런 표정이어서 참배객들에게 장엄한 신심을 전해주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단청으로 이어지는 비로전의 천정과 기둥은 한국사찰예술의 정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면에 14계단으로 앉아 계신 천불상은 경주의 옥돌로 조성되었으며,
고려시대 경잠(景岑) 대사에 의해 16년간 조성되어 모셔진, 당시 우리나라 유일의 천불상이다.
참배자가 법당에 들어갔을 때 가운데 발가벗고 서 있는 동자상인 나아상(裸兒像)이 있는데,
첫 눈에 이 나아상을 보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남월료
만덕전은 일명 불교연수회관
설법전은
불법의 선양과 불자들의 수련을 위해 신축된 건물이다.
이와 같은 만덕전과 설법전은 주로 직지사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위해 활용되는 공간이다.
포대화상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인정되고 있는 포대화상이 환하게 웃고 있다.
얼마나 많은 보살님들이 배를 쓰다듬었는지 배 부분이 빤질빤질...
직지사( 直指寺)공원입구
점심식사한 청산고을 식당메뉴
사찰입구 특이한 화장실
김천 부항땜
귀가전 뒷풀이
손희라 총무
백종희 감사
해설사 1대회장 강상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