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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윤선도가 풍류를 즐겼던 보길도 세연정

윤선도가 풍류를 즐겼던 세연정

윤선도 발길 묶은 섬, 보길도

고산이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세상을 보지 않으려고

제주도로 향하다가

아름다운 이 섬을 발견하고 '부용동'이란 이름을 짓고 살게 된 곳이라고 한다.

고산의 기발한 착상과 절묘한 자연과의 조화성으로 구성된

한국 최고 최대의 별서조경 유적이다.
세연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연보'에서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라 하고 있다.

세연정 입구 매표소

윤선도가 머물렀던 부용동 일대는 현제 명승 제34호 보길도 윤선도 원림으로 조성 되어있다.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부용동 정원(윤선도 원림)을 자비로 조성하고

 "부유동'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3대 전통 정원으로는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 영양의 서석지가 있다.

마늘밭을 배경으로 한 작은 마을 뒤로 큰 산이 보인다.

보길도엔 섬치고는 제법 높은 산이 많은 것 같다.

세연정(洗然亭)

세연정은 자연과 인공을 교묘히 접합시킨 조원(造園)으로,
자연못(세연지)과 인공못(회수담)을 태극무늬로 휘감아 돌리고 복판에

정자를 열십자각으로 지었다.
세연정 북쪽으로 네모난 인공 못인 회수담을 판 것은 못의 물을 오랫동안

가두기 위한 한 방책이기도 하다.
여름철에는 수량이 많지만 겨울에는 비교적 수량이 적은 세연지에는

칠암이라고 부르는 큰 바위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이름들이 저마다 하나의 이야기 거리로 손색이 없다.

세연정’은 주변 경관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해 기분이 상쾌해지는 정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두 연못 사이에 정자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세연정이다.


세연정 현판 글씨


 

 

 

 

 

 

 

 

 


 


 

세연정 주변의 잘 생긴 바위 7개를 칠암이라 부르는데 그중 하나 보이는 바위가 '

옥소대'를 향해 활을 쏠때 발 받침 역할을 하였다 하여 '사투암'이라 칭하였다 한다.
앞발을 딛는 각이 알맞게(약 60도) 세워져 있다.
옥소대란 세연정 건너편 가까운 산중턱에 있는 평평한 큰 바위를 말한다

개울에 보를(판석보, 일명 굴뚝다리)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된 세연지는

산중에 은둔하는 선비의 원림으로는 화려하고 규모가 크게 느껴졌다.

세연정 주변에 잘 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이라 불렀다.

칠암 중의 하나인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 받침 역할을 했다.

사투암은 연못 쪽이 들려진 모습인데, 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옥소대 쪽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칠암중에 하나인 이 바위는 뛸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혹약암이다.

혹약암은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고산은 이곳에서 주로 연회와 유희를 즐겼다고 한다.

풍악이 울려 퍼지면 동대와 서대에서 곱게 차려입은 기생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세연정에서 오른쪽에 있는 동대는 어부사시사가 불리워지면

여러 사람이 어울려 군무를 즐겼던 곳

윤선도선생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회를 베풀고 즐기면서 살다 갔다는 세연정.

 

 

동쪽에서는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서쪽에서는 기생 무희들이 춤을 추고,

연못에는 동자가 윤선도가 지은 시를 읊으면서 노를 젓고,

윤선도하면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어부사시사와 국문학의 대가라는

것만 알고 있다가.....

한 평생을 그렇게 호화롭게 살다 갔다는 것을 들으니 그만 맥이 쫙 빠진다.

항상 머리에 들어 있어 윤선도하면 어부사시사가 줄줄줄 나왔는데,

윤선도의 호화스런 생활을 알고 난 후부터는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왔을까''''''.

 

비가 오는 날에는 물을 담아 두기 위해 설치해 놓은 판석보이다

굴뚝다리라고도 불리는 판석보는 반반한 자연석으로 내부가 비도록 세워 만든 것으로

 한국 정원의 독특한 유적이다.

이것은 세연지에 물을 저장하였다가 회수담으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했다.

 

고산 윤선도

병자호란이 일어난 서기 1636년 해남에 살던 고산 윤선도가 의병을 일으켜

배를 타고강화로 가던 중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뱃길을 제주도로 돌렸다.

제주도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비를 피하려고 잠시 보길도에 머물렀는데,

그만 작은 섬의 매력에 푹 빠져 보길도에 정착하고 말았다.

고산(孤山) 윤선도는 끊이지 않는 당파 싸움 속에도 외로운 선비의 길을 걸었다.

송강 정철과 더불어 조선시대 대표 시인으로 꼽히는 고산은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으며, 건축과 미술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

윤선도의 유명한 시'오우가'는 56세때 해남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할 때지은
'山中新曲'에서 자연의 水.石.松.竹.月을 벗삼아 자연 사랑을 시로 쓴 시조이고,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는 이곳 세연정에서 춘하추동 자연의 아름다움을
때로는 현실에 대한 울분을 우리말로 표현한 40수의 가사로 표현하였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출처 : 레오의 이야기
글쓴이 : 팔박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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