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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일본)

일본 나가사키지역 여행(1)

일본 나가사키지역 여행 

 

 

나가사기지역은

 역사적으로 포르투갈 등 서양과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1550년에 처음으로 포르투갈 배가 입항하여 무역항으로서 발전하면서

약 90년에 걸쳐 에스파니아(스페인),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 등이 차례로 내항하여

당시 「서구의 도시」라고 불리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전해진 가톨릭교는 무역관계가 얽힌 종교분쟁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대두시켜 결국은 1641년에는 네덜란드 상관(무역관)의 폐쇄와

함게 대외무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일본 최초의 해외무역항으로 대륙과 일본의 교류거점으로 번영을 누린

나가사키지역은 동서 문화의 이국적인 향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장이다.

 

 

 

 

 

순례(巡禮)코스 

부산항- 하카타항 -라도시- 사세보- 나가사키(원폭공원.차이나타운)-

 운젠(지옥계곡)-시마바라(화산피해마을,사무라이촌) - 구마모토 

 

 

 

 

첫취항하는 드림호(쾌속정)을 타고 ..

 

첫취항 기념행사

 

 

오륙도를 지나

 

 

망망대해 현해탄을 바라보며..

 

 

 

 

 

 

하카타항에 도착

 

 

히라도(平戶)

일본 최초의 해외무역항으로 동서 문화의 이국적인 향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인 국제교류 도시이다.

 16세기에 기독교가 이 곳에 전해진 이후, 유럽의 문물이 많이 들어왔으며

아시아와 유럽이 혼연일체가 된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어 번영하여왔다.

그후 기독교가 금지됨에 따라 신분을 감춘 카톨릭신자와 순교자들의 수많은 애한이

서려있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 고장으로.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곳 히라도에서도 많은 파병이 있었고 .

그당시 영주 마츠우라씨는 귀국시에 조선도공 약 100명을 데리고 와서

 히라도야키라는 도자기 문화를 열어 조선문화를 도입하였다.

 

 

 

 

타비라 성당 

세멘트가없어 조개껍데기를 구워 빨간 벽돌을 만들어

신자 한명 한명의 손길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성당 뒤편에는 신자들의 묘지는

 천주교박해로 이 지역을 떠나야했던 신자들이

 죽어서라도 신부님이 있었던 성당 근처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 곳에 묻힌 사람들이 많단다.

 

 

 

 

 

 

 

히라도(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히라도 선교를 기념해 1931년에 건립한 성당이다. 
이 성당은 주첨탑을 작은 첨탑들이 둘러싸고 있는
독일식 고딕양식 건축물로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특이한 것은 고딕양식으로는 보기 드문 비대칭 건물로 정면에서 보면

왼쪽에만 팔각 탑이 보여 불가사의한 매력을 준다.

 

 

 

 

 

 

이성당은 박해를 피해  불교사찰과 신사(일본토속종교)사이에 있다고한다

 

 

 

 

 

 

모든 객실에서 바다가 보이는 '란푸호텔'은

약초탕, 해초탕, 전망 온천탕 등 12가지의 다양한 온천이 있다

 

 

 

 

 

저녁식사는 日本 定食이라는데..

 

석식후 호텔에서 공연도 보고

 

 

 

 

일본 전통복장를 한 깜직한 어린이들(무슨행사가 있는것 같은데...)

 

 

나가사키시( [長崎市] 로 이동

 

 

 

 

 

 

 

사세보항의 일본군함( 해상보안청있는곳 -해군본부 )

 

일본이 보유한 항공모항

 

 

 

 

 

 

 

 

사가사키시

(長崎市)

 

 

  

 

 

나가사키의 명물 노면 전차.

1914년부터 운행되고 있으며  수 십년 됨직한 낡은 전차들이 아직 거리를 누비고 있다.

( 일본 유일하게 자전거 도로가 없는도시)

 

 

 

 

 

사가사키 평화공원

 

평화공원 입구

 

 

 

 

 

평화기념상

     전체길이 10m의 평화기념상은  원폭10주년 기념일에 조각계의 권위자 키타무라사이보오씨가 제작한 청동 남신상으로 하늘을향한 오른손은 원폭의 두려움을 ,왼손은 평화를, 눈을 반쯤감은 유화한 얼굴은 전쟁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때로는

     부처의 자비, 때로는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낸다고 한다.(옮긴글)

 

 

 

학생들이 자리에 앉아 단체사진을 찍는데 순간 영화의 한장면처럼 느껴졌다.


 

 

 

평화기념상 한쪽에 서 있는 희생자 추모기념물.'종이학의 탑(折鶴の塔, )'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평화의 샘원폭 피해를 입은 소녀가 마실 물이 없었답니다.                         주변에 있는 물이라고는 모두 방사능에 오염된 물. 목이 마른 소녀는 그 물을 마셨답니다

.

 

 

 

 샘주변의 돌도 원폭당시 당시 검게 탄돌.

  

 

 

평화의 여신.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에 떨어진 원폭으로 24만 시민 중에 15만이 사망했답니다

 

 

 

폭심지(그라운드 제로)1945. 8. 9. 오전

폭격기 B29가 군수 산업시설이 밀집한 나가사키에. 폭격기가 투하한 4.6t짜리 원자 폭탄의 기폭 장치가 이 지점 상공 500m에서 작동하였다. 폭발의 결과로 반경 2km의 모든 건물은 완파되었고, 1 4만명  시민들이 즉사하고. 그 후로도 방사능 피폭에 의한 질환과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다. 사상자 중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도 상당수가 있었던 점을 기억해두자. 여기가 바로 원폭투하중심지, 일명 '폭심지(爆心地)'이다.

 

 

   

 

 

 원폭투하 직후에 뼈대만 남은 우라카미 성당의 일부를 이곳 공원에 옮겨놓은 것

  

원폭피해 자료관

 

 

 

 

미군기에서 촬영한 버섯구름(미군촬영)

 

1945년 8월 9일 11시 02분,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다.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떨어지자 일본제국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을 경우 몇 차례의 원자폭탄 투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5일 뒤에 항복의사를 전했다.

이미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8월 15일에는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실물크기 원자탄모형

 

"영원한 11시2분"

                                                              원폭이 폭발한 오전 11시 2분을 가리킨채 멈춘  벽시계....

 

 

 손뼈와유리

원폭의 열로 인해 녹아서 엉겨붙은 유리에 사람의 손가락뼈도 엉겨붙어 있다

 

고온에 형체가 변형된 유리병.

 원폭 폭발 직후 폭심지 지표면 온도가 4000도까지 올라갔다

 

 

피폭당시의 지층모습

 

원폭 자료실 앞에 새워진 동상(평화의 모자상)

  

 

원자폭탄 박물관입구에  한글이 보이는 안내판 

 내용은 일제식민지 당시 강제로 끌려와 노동을 당하는 조선사람이 나가사키 주변에

3만명 이상 살고 있었는데   원자폭탄에 의해 약 2만명이 피폭했다고 한다.


이 작은 추도비는 바로 일본사람이 비참하게 죽어간 조선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우리 민족의 아픔을 여기서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강제 노역을 위해 일본 땅으로 끌려왔다가 원자폭탄을 맞아 즉사하거나 병에 걸려 죽은

조선인들은  바로 우리 근대사의 슬픈 역사였다

 

 

 

원폭자료관 앞의 중국요리집.

화교가 많은 도시라 그런가 이런 중국풍 건물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인 식당에서 (나가사키 짬뽕)

 

나가사키 짬뽕

 1950년대 가난한 중국유학생을 위해 한 중국인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특별히 준비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유학생들을 돕기 위한 방법을 탐색하다가
자신의 식당에서 음식을 만들고 남은 여러가지 식재료를 넣어 만든 것이라고 이제는 나가사키의 명물이 되었다.

저렴하면서 많이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처럼 얼큰한 맛은 없지만 시원한 국물맛이 끝내준다~!

 

..

 

 

 

 

 

 

 

387년전통의 나카사키명물 카스테라

 

 

나가사키 카스테라

 나가사키에는 외국문물을 자기들의 것으로 토착화시킨 것이 많은데
카스테라도 그 중 하나이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들여온 것으로 '빵'이라는 포르투갈어를 일본발음으로 부르다가
조금 편하게 자기들 발음으로 만든 것이 카스테라라 한다.
 설탕조각들이 있어 굉장힌 단맛을 내고,그 부드러움이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고

 

 

 

 

 

 

 

 

동양최고의 교회 우라카미 천주당

 박해시대 때 후미에가 시행되던 촌장의 집터를 사들여

                                  30년 간 노동과 희생 끝에 1925년 붉은 벽돌의 대성당을 완성하였으나

기쁨은 20년도 채 누리지 못하고 원폭으로 성당과 신자를 한순간에 잃어버렸다.

1945년 8월9일 성모승천을 위해 성사를 준비하던 신자24명과 2명의 사제는

화염속에서 천국으로 떠났고

12,000 명의 신자 중 8.500명을 잃었으니 마을전체를 잃은 셈이다.

 

 

 

 

후미에란 천주교신자를 색출하기 위한 방안으로 고안 된 성화나 성상 등을 밟도록 하는 춤

 

 

 

 

우라까미 성당은 2차대전 당시 원폭으로 인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다.

 

 

 

 

 

 

원폭 당시의 성상(聖像)들

 

 

 

그 당시 원폭에 손실 된 성전 종탑벽이 부서져 도로 가 위에 그대로 언덕에 놓여져 있음.

 

 

나가사키 우라카미 주교좌 성당 모형도

 

 오우라성당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성당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정식명칭이 26성인 순교자 성당이다.

이 곳이 처음 생겼을 때 나가사키 주민들은 이 곳을 '프랑스절'이라 불렀단다.

물론 지금있는 건물은 원폭투하후 무너진 성당건물을 재건한 것이다.

하지만 그 가치가 높아 일본의 국보로 보호받고 있다.

 

 

 

 

 

 

마침 당일 성당에서 결혼식이 있어서..

 

 

 

 

무역을 장려하면서 가톨릭의 포교를 허가하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1597년 26명을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약 850km을 맨발로 걷게하여 니시자카 언덕에서 사형집행을 하였다고 한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기념비는

 이 곳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형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순교순간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눈빛으로 조금 더 하늘

                                 가까이로 가려고 하는 26명의 순교자들의 마음을 볼 수 있고

 

아이는 아이의 모습으로, 사제는 사제의 모습으로 한 눈에도 누군지 파악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만들어져 있었다.

 

 

념관과 니시사카 성당은

스페인의 유명한 건축가 가우디가 만든 성 가족 교회를 따라 설계된 것이다.

 화려하게 보이는 장식들은 도자기 조각으로 26성인들이 걸어온 길에 있는

도자기 가마의 도자기로 만들어졌다.

 

 

 

 

 

하늘로 솟아 있는 두 개의 탑 중 하나는 성모님을, 다른 하나는 성령을 의미한다

 

 

 

雪が降る(눈이 내리네) / Graciela Susa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