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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발칸반도9국)

아드리아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 2

 

 

 

 

  도시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올드타운 

 

오랜 역사를 대변하듯 대리석이 깔려있는 플라차 거리.
오노플리안 분수, 프란체스코 수도원,성모성천대성당,
 

스폰자궁과 시계탑, 렉터 궁전.  성블라이세 성당을 관광 할수있다

 

  (크로아티아)

 

 

 

 

 

 

 

 

 

 

 

 

 

 

 

 

 

 

 

 

 

 

파일게이트를 들어서면 보행자천국이다.

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없다.

누구나 걸어 다녀야 한다.

고개를 들면 중세 어느 도시로의 시간여행을 온 듯 착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주민들이 살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중세풍성곽도시다.

 

  

 

 

성문 안에서 처음 마주치는 게 유명한 오노프리오 분수다.

 

 

 

오노프리오 분수(The Great onofrio Fountain)

1448년에 오노프리오 데라카바에 의해 만들진 분수로 그의 이름을 붙였다.
중앙에 커다란 돔 모양의 석조 물이 있고 그 아래에 16면이 있으며

각 면에서 물이 나올 수 있도록 디자인 되었다.
원래는 돔 위에 커다란 쿠폴라와 조각상이 장식되었으나
1667년의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  

분수의 물은 약 20km 떨어진 리예카 두브로바츠카에 있는 우물에서 공급받고 있다.
이는 크로아티아에서 건설된 최초의 수로이며

그 당시로서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물을 공급 받는 시설 자체가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오노프리오가 디자인한 또 다른  분수로는  우아한 돌고래가 뛰노는

모양으로 장식 되었으며 중앙로인 스트라둔(Stradun)의 끝에 있는 타워앞에 위치한다

 

 

 

 

 

 

 

16면 각 면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멋스런 기둥이 세워졌는데,

그 기둥으로 몸체가 원형(圓形)이 아님을 깨우치게 한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몸체 16면의 각 면엔 인간과 동물을 형상화한 갖가지 잘 다듬어진 돌조각을 새겼다.

그 돌조각 입에 꽂힌 수도관을 통해 맑은 물이 나온다

 

 

 

 

 

 

 

프란체스코수도원( 분수대옆)

                         14세기에 건설되었는데 1667년 대지진으로 인해 많이 파괴 되었다.

수도원은 오래된 프레스코 기법으로 장식되었고 섬세한 기둥 장식이 정원을 감싸고 있다.
수도원은 예부터 약을 제조하는 것으로도 유명했고 지금은 제약박물관으로 사용하고있다.
박물관에서는 중세시대의 약 제조에 관한 역사는 물론 기구나 방법 등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도서관이 유명한데 이곳에는 고대의 원고와 귀중한 단행본과

손으로 일일이 쓴 원고 그리고 보물급의 공예품들이 방대하게 수집되어 있다.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박물관은 웅장한  ‘ㅁ’자 석조 건물이다.

14C에 건설된 초기 수도원은 이 도시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박물관은 고대서적과 그 필사본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수도원 입구

 

 

성인 프란치스코 상

 

 

 

 

 

 

수도원 정원이 건물 가운데 있고 아름다운 기둥들로 떠받친 회랑이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다,

줄지어선 기둥에는 각종 상들이 조각되었다.

 

 

 

 

  

 

1317년부터 존재했던 유럽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약국은  

 

 

현재도 운영되고 있다

 

 

프란체스코 수도원 바로 옆에 있는 성당

 

수도원내 성당내부

 

 

 

  대성당 (성모 마리아 승천 성당)세 차례에 걸쳐 지어진 이성당은  지붕의 색의 붉지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12세기에 영국의 리차드 왕이 처음으로 세운 건물로, 지진으로 파괴되었는데  1981년 재건축을 하려 했지만, 고고학자들이 성당의 하층에 7세기 고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당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면서 1986년에 와서 재건축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발견으로 고고학자들은 성당 위에 성당이 지어지고, 그 위에 다시 한번 성당이 지어져 모두 세번 건축이 된 것임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7세기경 처음 건축되었을 땐 비잔틴 양식으로,  12세기 땐 로마네스크 양식,

대지진 후인 18세기에 지어진 건물이 지금의 모습인 바로크 양식이다 

 

 

 

  대성당 (성모 마리아 승천 성당)

 대성당에는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1세에 관한 전설도 전해온다

그는 십자군 원정에서 귀국하다가 심한 풍랑을 만나 이 도시 앞에 떠있는 섬 로크룸에 피난한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왕은 고국으로 돌아간 뒤 비잔틴 양식의 건물을 헐고

육중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했다고 전한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전설을 자신의 희곡 <12夜>에 인용하였다. 

 성당 내부에는 

블라이세의 유물을 포함한 수많은 보물들이 있고
금으로 된 작은 보석상자에는 그의 유골과 발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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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외부에는 여러 성인들의 조각상 

 

 



성당 내부

 대리석으로 만든 제단과 기둥을 비롯하여 성화와 유물들로 화려하며

주 제단 뒷면에 는 ‘성모마리아의 승천’화가 그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인 티티안(Titian)이 그린 것으로,

이 그림으로 인해 이 대성당이 ‘성모승천 대성당’으로 불린다.

 

 

 

 

 

 

 

성모 승천 대성당은 티티아노의 그림 ‘파란띠를 두른 성모’(마리아의 몽소 승천)와

라파엘로의 ‘마돈나’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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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계단 손잡이

 

 

 

 

 

블라이세 성당은

 이 도시의 수호성인인 블라이세에게 헌납한 성당이다.

따라서 두브로브니크 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성당 출입문 꼭대기에 황금빛 번쩍이는 주교관(主敎冠)을 쓰고 왼팔에 지팡이를 낀 채

그 손엔 이 도시의 모형도를 든 그의 대형 조각상이 세워져있다.

 

 

 

 

 

블라이세의 조각상은 이 성당 외에도 도시 곳곳에 세워져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상은 성당이 보관한 은으로 만든 조각상이라고 전한다.

이 은조각상은 대지진이나 화재 때에도 손상되지 않고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다.

 

 

 

 

 

 

이도시의 평화와 독립을 상징하는 '롤랑'의 기둥

루자광장 중앙에 자유의 상징인 기사 올랜도 기둥이 있다...

중세 최고의 기사로 뽑히는 올랜도, 큰 칼을 가슴에 세운 형상으로 조각 되어있는

돌기둥을 일컬으며  프랑스 무훈시의 대표작 "올랜도의 노래"의 주인공이다.

1418년 기둥을 세우고 국기게양대로 사용되고있다.

 

 

 

성 사비오르 성당

1520년 지진후에 생존자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건축 

건물 규모는 작지만 튼튼하게 지어져 1667년 대지진에도 끄덕 없었다.

 

 

 

 

 

 

플라차 거리 (일명:스트라둔)

바닥은 대리석으로 포장되었고

도로의 총 길이는 약 280m 이며 1468년에 건설되었다.

거리는 하루종일 관광객과 사람들로 가득찬 활기찬 곳이다.
대리석 바닥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인해 매끄럽게 닳아버렸다.

‘스트라둔’은  이태리어인 '스트라다’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뜻이 바로 거리를 나타낸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 건물이 늘어서있는데

1 층은 상점, 레스토랑, 카페, 갤러리 등으로 사용하고 위 층은 대부분 집으로 사용한다.
현재의 건물은 1667년 대 지진 이후에 들어섰다.

 

 

하루 종일 관광객과 사람들로 가득찬 활기찬 곳이며

대리석 바닥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인해 매끄럽게 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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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풍경

 

플라차 거리 양쪽에 계속하여 있는 좁은 골목길에는 상점과 레스토랑이 있다

 

 

특이한것은 부억이나 주방이 맨위층에 있다

이유는 냄새를 피하고 화재시에도 아래층에 피해를 주지않게 위함이란다

 

 

 

집과 집사이가 너무도 가까워 두집사이에 줄을 매어 빨래를 걸어 놓을 정도다

 

 

 

긴골목길끝은 성벽으로 통하도록 되어있다

이는 적공격시 바로 성벽이나 요새로 갈수있도록...

 

 

 

 

 

 

골목길 어느곳에나  노천카페가 있고..

 

 

 

 

 

 

 

 

 

 

점심메뉴는  홍합과 오징어먹물 요리로

 

눈에 익은 상표 LG도 보이네요

 

 

 

천년전(10세기)에 벌써 이런 배수로  장치가..

 

 발자국에 닳아서 반질거리는 대리석  바닥길

 

 

 

 

루자광장.

이 광장은 바로 이 도시의 심장이다.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다.

두브로브니크가 도시국가로 번성했을 땐 의회가 의결한 법령이 여기서 공포되고,

법 집행 또한 여기서 이뤄졌다. 각종 행사가 열린 곳이다.

지금도 공연 등 이벤트가 열린다.

어둠이 깔리면 연극도 콘서트도 즐길 수 있다.

인종도 언어도 상관없이 한데 어우러져 아드리아 해의 낭만을 만끽하는 곳이기도 하다.

 

 

 

 

 

 

 

 

 

기념품을 파는 행상의 복장이  멋있고

 

 

렉터 궁전

1435년  오노프리오데라카바에 의해 건축되었다. 
귀족들을 위한 업무시설과 종교행사 때만 사용하였다. 
1667년대지진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17세기에 바로크양식으로 보수 되었다. 
 궁전의 2층은 현재 시 박물관으로 사용하고있다.
 특히 이곳에는 15,000점의 회화작품이 있는데
대부분이 베네치아와 달마티아 예술가들의 작품이다

 

 

 

 

 

 렉터(Rector)란

도시 최고통치자를 라 불렀다.

렉터는 권력의 독점을 막기 위해서 임기는 1개월로 40세 이상의 귀족이 돌아가면서 맡았다고 전한다.

2층인 이 궁전의 아래층 정면엔 아름다운 여섯 칸의 아취 형 공간 즉 주랑을 배흘림기둥이 받쳤다.

이 주랑 안쪽에 대형아치 형의 정문이 있다.

정문 양쪽으론 돌로 만든 예쁜 기다란 의자가 이어졌다.

2층 또한 여덟 개의 아치형 창문을 냈는데,

그 창문 중간엔 작은 배흘림기둥 하나씩이 받치고 있어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함께 갖췄다.

궁전 2층은 시박물관으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렉터궁전(Rector’s Palace) 박물관으로 변하여 전쟁의 역사들을 그림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화는 이런 전쟁 때문에 남자들이 매는 넥타이 

이곳에서부터 유래되어 넥타이의 원조란다.

 

 

 

어느 한 아가씨가 전장터로 나는 남자친구의 목에 손수 만든 수건을 감아 주었단다.

땀도 딱고, 혹시 상처가 나면 상처도 싸매면서 자기를 잊지 말고 살아 돌아 오라고….

이를 본 다른 처녀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그러다 보니 유독 이 지방에서 온 청년들의 목에는 모두가 다 형형색색의 수건을 감고

있는 것이 특이하게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하나의 유행이 되어서 남자들의 목에 매는 물건이 되었고,

그것이 진화되어 오늘의 넥타이가 되었단다.


 

 

 

 

 

 

정원에 있는 1638년에 세운 '미호 프라캣(Miho Pracat)'의 청동상

(거부였던 그는 시민들을 위하여 전 재산을 헌납하였다) 

 

 

 

 

 


1층 오른쪽 기둥 뒤쪽에 있는 문은 감옥으로 쓰이던 곳이다. 

(당시 가장 큰죄는 남을 속이는 죄였다)

 

감옥 입구

 

 

 

감옥내부

 

 

 

시계탑과 렉터 궁전 사이에 있는 돌고래모양의  '소 오노프리오 분수'

 

 

 

 

 

 돌고래모양의   분수

 

 

 

두브르브니크의  크로아티아 극작가였던 마린 드르작목사의 좌상

 

 

 

 

스폰자 궁전.

스폰자 궁전은 세관이었으나 그 후 조폐창 ,은행으로 쓰인 건물

 

1516년에 지은 이 건물의 1층 아치형 회랑은

6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2층은 후기 고딕양식 .3층은 르네상스 양식의 창문을 만들어,

여러가지 건축양식이 혼합된 아름다운 석조건물을 탄생시켰다.

 1667년 대지진 발생 때에도 지진을 잘 견뎌낸 건물이다.

지금은 국립기록 보관실로 사용되고있다

 

 

스폰자 궁전의  3층에도 '성 블라이세'의 돌조각상이 새겨졌다

 

 

 

도시의 종탑(The City Bell Tower)

스폰자 궁전 앞의 성 블레즈 광장에 있는 종탑 겸 시계탑은 1444년에 세웠으나 파괴되어

1929년에 다시 만든 것으로 종탑 높이는 35m, 종의 무게는 2ton이라고 한다.

종탑 아래에 있는 시계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다녀간 것을 기념하여 만들었다.

시간의 표시는 숫자 대신 이글거리는 태양 형상의 구부러진 선 12개가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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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

인종및 종교갈등으로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유고정부및 세르비아계의 처참한 내전으로

6개월만에 1만명이 사망하고 수십만이 피난.....드보르브니크의 30%가 파괴되었었다고 한다.

1995년 12월 데이튼 협정 (Dayton Agreement) 으로 마침내 안정을 되찾았다.

지금은 유네스코 지원으로 완전히 복구되어 '코스타 델 솔'이라는 과거의 명칭을 되찾았다.

 

그런데....

경각심을 주기위해선 지 군데 군데는 파괴된 채로 그대로 둔 모습이 보였다.

완전히 파괴된 모습으로 보아서 얼마나 처참했는 지...조금을 감이 오나

아무리 상상하려해도 이렇게 내 눈앞에 펼쳐진 천국의 모습을 보고는 무리인듯....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완전히 복구되었으나

이렇게 복구하지 않고 그대로 둔것은 그때의 처참했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