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거룩한 밤유래(Stille Nacht)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잘쯔부르크'에서
20km쯤 떨어진 국경지역에
'오베른도르프(Oberndorf)'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1818년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이 마을 "성 니콜라우스 교회"의 '요셉 모어(Joseph Mohr)' 신부가 만든 노랫말에
'프란쯔 그뤼버(Frantz Grueber)'라는 음악선생이 곡을 부쳐서 탄생하게 된 캐롤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Stille Nacht ,Heilige Nacht) "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오르간이 고장이 나서 기타반주로 합창을 불렀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고요한밤 거룩한밤 탄생한 경당
경당 내부
오번도르프 고요한밤 거룩한밤 탄생 지역에서 바라본 독일
이 캐럴이 탄생한 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세계 1차 대전 중의 전쟁터에서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1914년 12월, 프랑스 북부 릴(Lille) 근처의 서부 전선에서 영국군과 독일군이 평야인 개활지를 사이에 두고 각각 참호 속에서 상대를 향해 총을 겨누며 대치하고 있었다. 이 무렵 군인들은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편지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는데, 독일군의 가족들은 그들의 크리스마스 관습에 따라 크리스마스 트리용 작은 전나무를 많이 보내 왔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자, 독일군들은 참호 근처 흉벽 위에 수백 개의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들을 세우고 촛불과 전구로 장식했다. 독일군 참호에 수많은 불빛이 반짝거리자 영국군측은 긴장했고, 속임수가 아닐까 의심했다. 잠시 후 건너편 참호에서는 독일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캐럴인 ‘고요한 밤 거룩한 밤(Stille Nacht, Heilige Nacht)’ 노래 소리가 들려 왔다. 그 노래를 들은 영국군들이 ‘저들 밖에 한 밤 중에(The first Noel)’를 불렀고, 독일군들은 박수 갈채를 보내며 또 다른 독일 캐럴인 ‘소나무여(O Tannenbaum)’로 화답했다. 이렇게 독일군과 영국군 사이에 캐럴이 번갈아 오가며 이어지기를 계속했고, 마지막으로 영국군이 ‘참 반가운 신도여(O come all ye faithful)를 부르기 시작하자 곧 독일군들이 그 찬송가를 라틴어 가사 ‘Adeste Fideles’로 함께 부르며 모두 하나가 되었다. 친근해졌던 분위기가 고조되어 상대편을 향해 오라고 서로 소리쳐 부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각자의 참호에서 나와, 양측의 중간 지점 여기저기에서 영국군과 독일군이 만나 서로 악수하며 성탄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간의 적대감으로 총알이 오가던 전쟁터의 한 가운데가 크리스마스 이브의 어둠 속에서 만남의 장소로 변한 것이다. 다음 날 크리스마스 아침 동이 터오자, 양측 군인들은 개활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시체들을 모아 함께 묻어 주었고, 그곳에서 독일어와 영어로 기도하며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서로 음식과 담배, 기념품 등을 나누었고, 깨끗하게 정리된 그 개활지에서 함께 축구 게임을 하며 즐겼다고 한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이려고 총을 겨누었던 그들이 함께 웃으며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놀라운 기적이 전쟁터에서 일어난 것이다. “ (Silent night Holy night - Enya) |
1818년 12월 24일 오스트리아 오베른도르프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집집이 성탄 나무를 장식하고 자정미사에 참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 니콜라우스 성당의 요세프 모어 신부(26세)는 방금 심하게 고장난오르간을 발견하였다. 수리공을 불러도 며칠 후에나 올 것이고..... 음악이 없는 크리스마스 미사란....
그는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어린 시절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며 바이올린과 기타를 연주해서돈을 벌어 대학까지 공부했었다. 그의 근면성과 재능에 주목한 한 신부가 신학교에 들어가라고그를 설득했다. 1815년 그는 사제서품을 받고 1817년 오베른도르프로 부임해 왔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난처한 처지에 빠진 모어 신부는 조용히 자기 서재로 갔다.당시 캐럴들은 기타로 연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새로운 노래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책상 위에 백지를 펼쳐 놓고 최근에 갓난아기를 축복해 주기 위해 찾아갔던 한 가족을 떠올리면서 2000년 전 아기 예수가 태어나던 장면을 연상했다. 창 밖에는 함박눈이내리고, 그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는 불후의 첫 구절을 썼다. 동시처럼 편하고 간결하며 아름다운 여섯 연의 노래말이 완성되었다.미사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서둘러 곡을 붙여야 하였기에 그는 이웃마을에 교사로 있는 절친한 친구 그루버(31세)를 찾아갔다. 작곡에는 그가 더 능했기 때문이다.그는 직업은 교사였으나 음악적 재능이 탁월한 이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 겸 성가대지휘자였다. 그루버는 모어 신부가 쓴 노랫말을 읽고, 이 경건한 가사에 성스럽고 아름다운멜로디를 엮었다. 성가대가 연습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모어가 기타를 치면서 테너를,그루버는 베이스 부분을 노래하고 각 연이 끝날 때마다 성가대가 후렴을 부르기로 했다. 장중한 크리스마스 성가가 울러 퍼질 것을 예상하고 성당에 들어온 신자들은 뜻밖에알프스의 시냇물처럼 신선하고 아름다운 캐럴을 경건한 마음으로 들었다.이어 모어 신부는 축하 미사를 집전했고 성탄절 미사는 성공리에 끝났다.
이듬해 봄 수리공이 와서 성당 오르간을 고쳤다. 모어 신부는 곧 다른 교구로 이동되었고 그가 만든 캐럴은 잊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성 니콜라우스 성당의 오르간이 자주 고장이 났다. 1824년경에 오르간을 다시 제작하기 위해 마우라허라는 장인을 고용했는데 그가 다락방에서일하다가 이 노래 악보를 발견했다. 노래의 간결성이 늙은 오르간 장인에세 감동을 줬다.그는 그루버에게 악보를 얻었고 정기적으로 유럽 곳곳을 순회하던 민속 악단들이 '고요한 밤,거룩한 밤'을 연주곡목에 추가하게 되었으나, 그 노래는 티롤 지방 민요라고 알려졌다. 즉 이 노래 가사와 곡조는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 나갔지만 작사 작곡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1848년 모어 신부는 폐렴에 걸려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1854년 프러시아 국왕의 궁정악장이 이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작사 작곡자가 누구인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접한 67세의 그루버가 그 경위를 알리는편지를 베를린으로 보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이제 크리스마스 음악의 상징이 되어 세계 각국에서 불리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시베리아의 어느 포로수용소에서 독일군, 오스트리아군, 헝가리군 포로들이 일제히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합창했다. 러시아 포로수용소장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서툰 독일어로 포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 나는 전쟁이 일어난 후 처음으로 당신네와 내가 적이라는 사실를 잊을 수 있었다."
이 단순한 캐럴이 하늘의 평화를 만들어 내는 놀라운 힘을 보여 주고 있는 예는 이외에도 많다.
가톨릭 다이제스트 (199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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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니콜라우스 교회의 현재 모습
작사자, 작곡자 및 당시의 악보
기념품 가게
작곡 당시의 흔적들
관광객들을 위한 까페(까페의 이름도 '고요한 밤'입니다)
1937년 8월 15일 성 니콜라우스 교회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노래를 만든 모어 사제와 그뤼버 선생을 기념하여 이 교회를 '고요한 밤 교회'(Stille Nacht Kapelle)라고 부르게 되었다.
프란스 사버 그루버
프란츠 사버 그루버(1787-1863)는 티롤지방의 작은 마을인 아른스도르프(Arnsdorf)의 초등학교 음악선생로서 마을 교회의 오르간 주자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인근 오베른도르프(Oberndorf)에 있는 성니콜라스 교회의 오르간주자 겸 합창지휘자였다. 그루버는 성니콜라스 성당의 요셉 모르(Josef Mohr) 신부와 함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작곡하였다. 1818년 12월 24일, 성니콜라스 교회의 모르 신부는 그루버에게 그가 2년전에 써놓았던 여섯 소절의 시를 보여주며 멜로디를 붙일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다음날의 성탄절 미사에서 모르 신부와 그루버는 그루버가 멜로디를 붙인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함께 불렀다. 모르 신부가 기타로 반주하였다. 성니콜라스 교회의 성가대가 ‘아기 잘도 잔다’라는 가사로 된 마지막 부분의 두 소설을 합창으로 불렀다. 그로부터 ‘고요한 밤’은 유럽의 전역과 아메리카 신대륙,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루버는 십여편의 미사곡과 캐롤도 작곡하였으며 아직도 오스트리아의 교회에서는 그루버의 작품을 연주하고 있다.
아른스도르프 교회 호흐부르크의 그루버 생가
할라인 마을의 프란츠 사버 그루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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