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지순례(동유럽)

동유럽의 장미 헝가리 부다페스트(동유럽성지순례7)

 

헝 가 리

 

 

 

수도:부다페스트(210만명)

인구: 1.000만 면적: 93.031평방km(한반도2/5)

 

 

부다 페스트

수도인 부다페스트는 인구 약 210만 명이 사는 동유럽 최대의 도시이다 

다뉴브강을 경계로 부다와 페스트지역으로 나뉜다

 다뉴브강의 아름다운 8개다리.합스부르크 왕조의 아름다운  건축양식.

자연환경은 "동유럽의 장미" ."다뉴브의진주" 로 불리운다

 다뉴브강의 야경은 너무나  환상적이다

 

 

 

  영웅 광장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해 만든 기념탑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1896년에 조성한 광장으로 중앙에 대천사 가브리엘이  35m 탑위에 서 있는데

오른손에는 헝가리 왕관을, 왼손에는 로마교황의 십자가를 들고 있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조각된 중앙탑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말을 탄 마자르의 일곱개 부족장들과 그 수장 '아르파트'가 조각되어 있고,

반원형으로 나뉘어진 2개의 주량 양쪽에는 

헝가리의 초대국왕 '이슈트반'과 독립운동가 '코슈트' 등

역대왕들과 영웅들이 연대순으로 조각되어 있다.  

어느날 가브리엘 대천사가 로마왕의 꿈에 나타나 이슈트반 1세에게 왕위를 내리도록 했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영웅광장옆 국립 미술관

저녁은 칼덴베르크에서(옛날 지하 술창고였다고합니다)

 

직접 발효한 헝가리 하우스 맥주를 맛보고

 

 

집시들의 음악공연

 

모두가 신나게 춤과 노래를

결혼34주년 기념축하연도..(클레멘스. 로사부부)

 

 

 

 

 

 

 

 

 

헝가리의 슬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세체니다리

 

영화 '글루미 썬데이'에서 독일 사업가 한스가 일로나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뒤 글루미썬데이라는 곡을 듣고 다리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영화 속에서 우울한 음악이 나올 때마다 이 다리가 등장하는데  영화 때문일까 최근까지도 이 다리에서 자살하는 헝가리인이 많았다고 한다. 래서 보트가 늘 대기하고 있다고 하는데  헝가리와 한국이 자살 1,2위 국을 다툰다는데 .......

 

 

 

 

도나우( 다뉴브)강 야간 유람선상에서

 

길이 약 2,850km, 유역면적 약 81만 6000㎢이다.

영어로는 다뉴브(Danube), 체코어로는 두나이(Dunaj),

헝가리어로는 두나(Duna),

세르비아어·불가리아어로는 두나브(Dunav), 루마니아어로는 두너레아(Dunărea)로,

모두가 라틴어 두나비우스(Dunavius)에서 유래한다.

 

 볼가강에 버금가는 긴 강으로,

본류는 독일·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

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루마니아·우크라이나 등 여러 나라를 지나고,
빈·부다페스트·베오그라드 등 각국의 수도가 모두 그 본류 연안에 위치한다.

 

 

 

  

 

 

도나우강 야간유람선상에서 멋진 왈츠춤을...

 

 

 

 

 

환상적인 도나우강의 야경

 

 

 

 

 

 

 

 

 

 겔레르트언덕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길다는 도나우강을 멋지게 볼 수 있는 포인트다. 강을 중심으로 좌측 언덕이 왕궁이 있는 곳이 부다지역이고, 오른쪽 평지가 페스트지역이다. 부다는 고대 로마의 군사기지로 시작되어 왕궁에는 발굴터가 있으며 페스트는 13세기 이후에 도시를 이루기 시작해서 중세이후 상업과 예술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1849년 세체니 다리가 연결되면서 두 도시는 하나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도나우강 8개의 다리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체니다리를 볼수있는포인트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

 

 

 

 

 

 

 

 

 

 

 

 

 

 

 

천장 돔이 화려한 성이슈트반 대성당 

 

기독교를 헝가리에 전파한  이스트반을 기리기 위한 성당으로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50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탑의 높이는 96m로, 건국의 해인 896년에서 96을 의미한다. 도나우강변의 모든 건물은 시야을 위해 이 성당보다 더 높게 지을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주제단 한 가운데 모신 분은 예수님이 아니라 이슈트반왕이다.  

 

박공에 새겨진 성인상.희브리어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4:6)' 

 

        

이슈트반왕의 오른손 미(퍼음)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국회의사당

 

 건국 1천년을 기념해 세운 성당으로 외벽엔 헝가리 역대 통치자 88명의 동상이 서있으며 1년 365일을 상징하는 365개의 첨탑이 있다.

 

 

 

 

어부의 요새 

 

 

 

 

 

 

네오로마네스크 양식의 어부의 요새. 고깔모양의 뾰족한 탑 7개가 도나우강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헝가리 7개 부족을 상징하고 있다. 외적의 침입을 받을 때 시민군은 왕궁의 지켰고 도나우강가에 살던 어부들은 강 건너 기습하는 적들을 지켰는데 그들이 축조했다고 해서 어부의 요새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헝가리 건국의 아버지 이슈트반의 기마상.

 

 

 

 

 

 

 

  

 

 

 

 

 

 

 

 

 종려나무잎을 높이 들고 있는 여신상은 독일로부터 도시를 해방시킨 소련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조형물이다. 여신은 모스크바를 바라보고 있다.

 

 

치타델라 요새겔레르트 언덕 정상이 있는 요새로  합스부르크왕가가 헝가리를 감시하기 위해 세웠다. 2차세계대전때는 독일이 주둔하여 부다페스트 시내를 향해 포격했던 장소다. 그때 왕궁과 세체니 다리 등 구시가지 대부분이 폐허가 되고 만다. 당시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자신을 향해 포격을 가했던 대포를 전시해 놓아 역사의 교훈을 삼고자 했다.

 

 

 

 

 

 

해발 235m의 바위산에 위치한 이 '겔레르트 언덕'은

예전에는 '케렌 언덕'이라고 불렀는데,

11세기

카톨릭을 전파하다 순교한 이탈리아 선교사 '겔레르트'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겔레르트언덕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지정

 

 

왼쪽에 왕궁이 보이고 서쪽이 부다, 동쪽이 페스트 지역.부다페스트는 세계에서 6번째로 아름다운 도시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글루미 썬데이'라는 영화가

 탄생하게 된 배경과 주제곡에 얽힌 일화가 있다.

 

왕궁극장. 베토벤이 이곳에서 머물면서 월광소나타, '엘리제를 위하여'를 작곡했던 곳.

 

 

 

 

 

 

로마유적 터(복원중)

 

 

 

부다왕궁

 

 

 

 

 

 

삼위일체상은 페스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한다.

 

 

 

  

  

 

 

 

 

 마차시 성당

카톨릭과 이슬람의 분위기가 혼재한 마차시 성당헝가리 건물의 특징이 바로 알록달록한 지붕인데 도자기를 한조각 한조각 구워 붙였다고 한다.  색깔이 매우 화려하고 독특한데 헝가리 유명한 도자기 회사인 헤렌드가 도자 지붕을 올렸다고 한다. 몇 년에 한번씩 지붕을 교체하는데 내려진 지붕은 판매한다고 한다.  마차시 왕의 명으로 지은 성당으로 왕가의 문장과 머리카락이 보관되었으며 성당명이 되었다. 대관식과 두 번의 결혼식을 거행했다고한다. 

 

1541년 터키에 점령당하자  회교사원으로 바뀌어 150년동안 사용되었는데 이때 중앙제단이 모두 파괴되었고 이슬람  아라베스크 무늬로 바뀌게 된다. 투르크가 물러나자 다시 바뀌면서 바로크 스타일로 개축되었다. .  5세기에 지은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처럼... 

 

이슬람 아라베스크 무늬

 

황금으로 치장한 중앙제단

  

 

헝가리 황제의 왕관 모조품. 십자가가 살짝 기울어진 것이 특징

 

성당모형

   

 

 

 

 

  

   

  

 

 

 

요한 스트라우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헝가리는 슬픈 역사의 나라입니다.

 14세기에 몽골의 침입을 받았고 15세기 마차시 성당을 세운 마차시 국왕때

전성기를 맞아 모라비아 왕국을 함락시키지만

1526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국왕이 전사하면서 투르크의 지배를 받다가

풍운아 사보이공자 오이겐의 투르크 축출로 오스트리아의 속국이 됩니다.

 

1867년 오스트리아와의 협약으로 이중제국이 되면서 자치권을 받아

일차대전 전까지 번영의 길을 걷지만,

일차대전에 오스트리아와 함께 참전했다가 패전으로 이어졌고

루마니아, 독일의 잇따른 침략을 받은 끝에 결국 공산화됩니다.

 1956년 반소봉기를 비롯해 시민들이 모이는 장소가 국회의사당 광장이라고 하더군요.

 

 

 

유럽속에 아시아인, 마자르족

 

도나우 강은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인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이 떠오른다. 지형적 경계선이 터키라면 정신적인 경계선은 헝가리가 아닐까 싶다.

 

 유럽의 한가운데 자리한 헝가리는 7개 나라와 몸을 맞대고 있는데 게르만, 라틴, 슬라브족들 사이에 외딴 섬처럼 아시아 인종을 이루며 살아오고 있다. 우랄산맥 동쪽 유목민족이 넘어간 '마자르인', 정신적 혈연적 기반으로 유럽한 가운데에서 섬처럼 독특한 문화를 일궈내고 있다. 아마도 수많은 외침에도 동화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마자르정신'에 있지 않을까 싶다. 마자르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을 거의 하늘을 찌르게 되는데 '마자르인', '마자르 음식', 헝가리 항공사 이름이 '마자르'인 것을 보면 그들의 국가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게 해준다. 그래서일까 헝가리인의 외모는 완연한 서양인으로 바뀌었지만 육감적으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시조가 주몽처럼 알에서 태어났고, 아이들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으며 이름앞에 성을 쓰고 존대말도 쓴다. '빨리 빨리' 문화가 있고, 매운 음식인 고추를 즐기며, '궁상각치우' 음악까지 있으니 한국인의 정서와 묘하게도 닮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말 타고 가는데 2년이 걸린다는데 그보다 더 먼 곳에서 우리네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니 마냥 신기하다.

 

  우랄산맥을 넘어서 헝가리인들은 우랄산맥 동쪽에서 넘어왔다. 오늘날 카자흐스탄,우즈베크스탄 등이 아니면 몽골과 우리나라까지도 선조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때 헝가리의 조상들이 개성 벽란도에 들어와 비단과 인삼을 샀는지도 모른다.  'Hungary'의 이름에서 보듯 헝가리인의 뿌리가 한때 유럽을 공포로 몰아 넣은 Hun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헝가리인들은 마자르족이지만 10세기 이전의 기록은 다 지워졌기 때문에 그 뿌리야 말로 수수께끼다. 아무래도 훈족의 후예가 아닌가 싶은데  이는 우리 역사책에도 등장하는 흉노족을 말한다. 한무제에 쫒겨 서쪽을 달아났다고 하는데 로마의 멸망을 재촉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긴 부다페스트 시내 곳곳의 청동상들이 거의 말을 타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초원을 누비며 세상을 호령했던 북방 유목민임이 틀림없다.  비운의 역사, 헝가리거대한 산맥을 넘어 유럽 땅으로 와 처음에는 부족국가를 이루다가 이스트반 1세(재위 997~1038) 때 헝가리의 첫 왕으로 즉위하고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급속히 유럽화가 진행된다.  그러나 1241년 무시무시한 몽고군이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 침략하는 바람에헝가리는 쑥대밭이 되고 만다. 다행히 몽고의 대칸이 죽을 때마다 주둔군들이 썰물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국가 위기를 넘기곤 했다. 그러고보니 몽고라는 나라는 동쪽으로 한반도, 서쪽으로 헝가리까지 세력을 넓혔으니 인류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나라였다. 서양인을 벌벌 떨게 한 몽고족이 요즈음 한족 트럭에 깔려도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역사란 참 묘하다. 유럽대륙까지 호령한 기백은 사라지고 은둔국가로 바뀐 것이다.   어쨌든 몽고가 물러나자 헝가리는 문화의 번영을 구가한다. 200여년간 건축, 음악 등 르네상스의 행복을 누리다가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이 궤멸당하면서 다시 중동의 강자인 오스만 투르크의 말발굽 아래 놓이게 된다. 150년 간 나라 잃은 설움속에 식민지의 삶을 이어나갔고 오로지 마자르 정신으로 버티었다. 그러나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투르크군은 오스트리아 빈 앞에서 오이겐공에 의해섬멸당하고만다. 다시 헝가리 쪽으로 후퇴해 밀고 밀리는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전쟁의 고통은 고스란히 헝가리인의 몫이었다. 결국 헝가리 서북부는 오스트리아가, 동남부는 투르크에 분할되는 상황의 놓이게 되는데 분단이 진행중인 우리로서는 동병상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투르크군은 헝가리 땅에서 물러갔지만 그 자리를 합스부르크 왕가가 차지한다. 그들은 유화정책이 아닌 공포정치로 헝가리를 통치했다. 주인만 바뀌었지 지긋지긋한 머슴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헝가리인의 마음속에는 늘 독립혼이 일렁이고있었다. 1848년 오스트리아의 힘이 약해지자 헝가리인들은 독립전쟁을 일으키는데 그 위세에 놀란 합스부르크왕가는 꾀를 낸다. 오스트리아는 황제의 칭호를 받고 헝가리인에게 자치권을 주고 간섭하지 않겠다며 유혹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래없는 'K & K왕국(오스트리아 헝가리왕국)'이다. 그러나 명목상 합병이니 오스트리아의 뜻을 저버릴 수 없는 노릇이다. 제1차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헝가리느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에서 서서 싸우다 퍠전국이 되었고 아니러니하게도 전쟁덕에 그토록 원했던 독립을 얻게 된다. 태평양 전쟁으로 패망한 일본 때문에 광복을 얻은 우리네와 흡사한 장면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충돌을 일삼는데 히틀러의 나치 정부 등 극우세력이 득세하자 결국 제 2차세계대전에서 헝가리는 독일과 이태리 편에 서서 또 한번 패전의 맛을 본다.  이쯤되니  헝가리만큼 줄을 잘못 서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전쟁에 개입할수록 수많은 문화유산은 파괴되고 전후 재건의 고통은 모두 국민들 몫이다. 나치가 물러나자 1944년 소련의 붉은 군대가 이땅에 깃발을 꽂는다. 또다시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고만다.  좌절과 고통. 마지막 심지마져 꺼질 것만 같은 헝가리였지만 1956년 10월 23일 공산위성국에서는 최초로 반공 반소 시민봉기가 일어난다. 김춘수 시인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에도 소개되었듯 지구인의 시선은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2주간 봉기로 수만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20만명이 고국을 등지고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결국 마자르인의 궤도에 들어왔다. 1989년 동구권에 개혁의 바람이 일자 헝가리는 그토록 기다렸던 공산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자유세계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헝가리는 유럽의 서쪽을 차지하고 있어 전쟁의 방패막이역할을 해야만 했다. 강대국의 균형이 깨지면 영락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야만 했던 비운의 국가다. 반도국가이기에 시련과 분단의 겪었던 우리네 역사와 흡사한 점이 있다. 2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부다페스트는 70%가 파괴되었고 사회주의속에서 정신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오늘날 유럽의 아시아민족으로 그 정체성을 유지해온 것만으로 대견한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