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지순례(동유럽)

동유럽의 로마" 체코의 프라하 (종합)

 

동유럽의 로마" 체코의 프라하

 

(1993년 체코공화국와 슬로바키아공화국으로 분리)

 

천년역사를 가진도시 라하는 체코의 수도이며 
로마네스크 .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아르누보 양식까지

그야말로 건축양식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1992년 구시가전도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차에 걸친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혁명,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1968년 자유주의운동과

구 소련군의 탱크 공세까지 오랜 세파를 이겨낸 프라하는

1989년 무혈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동유럽이 개방되자

유럽 최대의 관광도시 이다.

 

 

해마다 1억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다는 프라하!
북방의 로마’·’유럽의 심장’·’흰 탑의 황금 도시’·’유럽의 음악원’

등이

프라하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모차르트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다는 도시,

프란츠 카프카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는 마력의 도시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어느 시점에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곳이다.


 

 

 

 

 

 

 

 

 

 

 

 

 

 

 

 

 

 

 

 

틴 성모 마리아 대성당

프라하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성당으로, 1365년에 건립

 80m 높이의 2개의 첨탑은 이 교회의 상징으로 멀리서도 볼 수 있다. 

기도할때 두 손을 모은 모습으로

  일명 쌍둥이 탑으로 아담과 이브를 상징한다고

황금 성배를 녹여 부착한 첨탑의 성모마리아상은 성당의 명물

 

 

황금의 성모님 상 

 첨탑 사이에 성모상은 황금 성배를 녹여 만들었다고 한다. 

 

 

틴 성당 (Tyn Church)


프라하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성당으로, 1365년에 건립

 80m 높이의 2개의 첨탑은 이 교회의 상징으로 멀리서도 볼 수 있다. 

황금 성배를 녹여 부착한 첨탑의 성모마리아상은 성당의 명물로 꼽힌다

슬픈 전설이 남아 있는 성당이라고 .  

성당에 미남 신부가 있었는데 첼레트나 거리(틴성당에서 화약탑가는 거리)의 여인이 이 신부에게 반한 것이다.  어느 비오는 날 교회내의 십자가를 밖으로 옮기려고 하는데 기다리던 여인이 신부에게 달려든 것이다. 놀란 신부는 무거운 십자가를 놓쳤고 그 여인은 십자가에 깔려 죽고 만다. 비 오는날  이거리를 배회하면 남자들의 영혼을 빼앗는 귀신을 만난다고하는 전설이....

 

모서리의 석종- 어떤소리가날가... 
바츨라프 광장  이곳은 체코의 근현대사 역사를 간직한 현장으로  20세기 초까지 시장이었다가 1차 세계대전후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몰락하면서 체코가 독립을 얻게 되었는데 바로 이곳 바츨라프 광장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48년에는 공산당 장악하여 사회주의 공화국이, 1968년 '프라하의 봄' 때 소련군의 탱크부대에 맨몸을 맞서 싸운 곳이기도 하다.. 

 

 

보헤미안의 수호신인 성 바츨라프 기마상

 

 

 길이 750m, 폭 60m거리로 프라하 신시가지 최대의 번화가다

 

 

 

.

 

1989년 공산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던 곳으로 벨벳혁명의 중심지로 공산주의 정권의 종말을 고한 역사적 현장이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하벨대통령이다. '벨벳'이란 조용한, 평화적인 의미의 형용사로 무혈혁명의 동의어다. 당시 시민들은 열쇠와 꽃을 경찰에 꽂아줌으로써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체코의 민주화를 이뤄낸 성지다

 

 

 

 

1968년프라하봄때  소련군탱크를 둘러쌓고있는 프라하시민

 

 

 

 

 

 

 프라하의 봄을 탄압하던 소련군에 저항하다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동판

 

..

 

얀 후스 동상 

얀 후스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카를 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모라비아 지역을 토지 80%가 성직자들의 손에 있었고,  많은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 부를 축척해 나갔다.  

 얀 후스는 이것을 보다 못해 기독교 개혁을 외쳤다.

“하느님의 말씀은 성경 속에 있는 것이지 교황의 입 속에 있지 않다.”

재산을 농민들에게 돌려주라고 비판하다가 교황 요한네스 23세에게 파문 당하고

 콘스탄트 공회정에 소환되어  화형을 당한 체코의 신학자였다.

 

화형대에 불이 붙기 직전 후스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이 지나지 않아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자신이 심은 개혁의 불씨가 100년 안에 거대한 불길로 타오를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실제 거의 100년 만에 ‘백조’가 나타났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다. 후스가 화형 당한 게 1415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게 1517년이다.

.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란 뜻이다)

 동상에는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이야기하고, 진실을 지켜라" 라고 새겨져 있다

 

해마다 1억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다는 프라하. 그곳 프라하 성은 길이는 570m, 폭 128m로 세상에서 가장 큰 성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불법주차는 이렇게 단속(꼼짝못하게..)

 

 

 

 

 

 

정시가 되면 칼렌다륨 위쪽 창문으로 해골이 나타나고 그 뒤로 12명의 사도들이 창문을 통해 지나간다. 윗쪽 황금색 닭이 나와 울리면 문이 닫힌다. 나팔을 불면 전망대 위에서 나팔을 불게 된다.

 

 

 

위쪽 시계는 칼렌다륨으로 천동설의 원리에 따른 해와 달과 천체의 움직임을 묘사했고 아래플라네타륨은 12개의 계절별 장면을 묘사했다.그러니까 위쪽은 시계, 아래쪽은 달력으로 보면 된다.  

 

 

 

 

 

오를로이 천문시계구시청사에 인파가 몰리는 이유는 은 바로 오를로이 천문시계 때문이다. 당시 프라하 대학 수학교수인 하누쉬와 조수 미쿨라세가 함께 만들어 시청사에 걸었는데 당시 프라하 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시계주문이 쇄도하자 시의회는 시계를 독점하고자 음모를 꾸민다. 아누쉬가 열심히 일하던 밤 복면을 쓴 3명의 자객이 그를 묶어 놓고 불로 달군 쇠꼬치로 눈을 찌른다. 폐인이 된 하누쉬는 마지막으로 시계를 만지겠다고 요청했고 그가 손으로 천문시계를 어루만지자 시계는 갑자기 멈춰 버린다

 

 

 

 

 

 

시민회관. 역대 왕의 궁정이 있던 곳으로 화재가 나서 잿더미가되고 1911년 오늘날 시민회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프라하의 봄' 음악회장인 스메타나홀이 있으며 카페, 레스토랑이 있다. 입구 아치에 그려진 벽화가 일품이다.

 

 

 

 

 

 

시청사 입구 문에는 당시에 처형당한 27명의 명판이 걸려 있고 그 앞에 27개의 하얀 십자기와 1621년 6월 21일을 새겨 놓았다.

 

 

 

 

   

 

몽둥이를 들고 위협하고 있는 인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 타이탄의 형상으로 막강한 힘의 지배자인 합스부르크 왕가를 의미하며 밑에 깔려 고통받은 사람은 체코인이다.오스트리아 왕가가 체코를 지배할 당시 그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세운 조형물인데 한국 같았으면 진작에 없애 버렸을 치욕적인 상징을 체코인들은 쓰라린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고자 이 동상을 그대로 두고 있다.

 

 

매시 정각에 근위대 교대식이 있는데 12시가 가장 화려하다고 한다.  구왕궁건물은 대통령집무실과 영빈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드라마 '프라하 연인'에서  소원의 벽으로 나왔던 얀후스 동상. 그의 서거 500주년을 맞이해 1915년 광장 한가운데 세웠다. 전도연이 이 벽에 김주혁과 사랑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원지를 붙여 놓는 곳으로 유명하다.

 

  

  

 

 

 

 

 둘이 타고 다녔던 마차는 변함없이 광장을 지나 다닌다.

 

 

 구시가 광장의 명품거리는 한때 '김일성 거리'로 불리기도했는데

체코가 공산주의 시절때, 기차를 타고오는 김일성을 기쁘게 하기위해

매스게임과 꽃길까지 준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체코인들은 한국을 떠올릴때 북한을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고 ......  

 

 그유명한 크리스탈 가게

 

 

 

 

 

 

 

 

 

 

 

 

 

 

 

 

 

 

 

 

 

 

 

장 미 창천지창조의 하루하루를 묘사했다고하는데  장미는 자혜의 꽃이며 성모님을 상징한다.

 

성당내부에 들어가는데 입장료를 내는데....

 

  

 

 성비투스 성당


프라하 최대 건축물중의 하나이며 체코의 프라하 성 중앙에 있다.
1344년 카를 4세 때 착공하여 계속 증.개축이 이루어져 1929년에야 완공되어

체코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성당이 완성될 당시 최초 설립자인
웬체슬라스 왕자의 서거 1,000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중세의 고딕 양식을 바탕으로 여러 양식이 혼합되어 있고

성당 내부의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로 유명하다.

 

 

처음 건설될 당시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3세 중엽에 초기 고딕 양식이 첨가되고, 이어 14세기에는 프라하 출신인 카를 4세에 의해

 왕궁과 성십자가교회 등이 고딕 양식으로 새롭게 건축되면서 이 때부터 체코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그 뒤 블라디슬라프 2세 때 후기 고딕 양식이 가미되고,

 1526년 합스부르크왕가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다시 르네상스 양식이 도입되었다.

그러다 바로크시대인 1753년부터 1775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는데,

시작에서 완성될 때까지 900년이나 걸렸다.

 

처음엔 고딕식을 짓다가 16세기 중엽 르네상스식 첨탑이 완공되고

17세기에는 양파모양의 바로크식 지붕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스전쟁과 자금난으로 공사가 중단되는 등 난관에 부딛쳤다.  

길이는 124m, 폭 60m, 천장 높이 38m, 첨탑은 100m로 프라하 어디에서도 보이는 아이콘이다

 

 

성당후면

 

 

 

 

 

 

 

왕의 출입문 골든게이트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프라하 문장

'낮에는 문이 닫히지 않을 것이며'

 

대통령궁에도, 맨홀 뚜껑애도 이 문장을 볼 수 있는데 바로 프라하문장이다. 요한묵시록 21장을 읽어보면 이 문장을 이해할 것이다.  23절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25절 거기에는 밤이 없으므로 종일토록 성문이 닿히지 않습니다. 

 

26절 사람들은 민족들의 보화와 보배를 그 도성으로 가져갈 것입니다.

 

27절 그러나 부정한 것은 그 무엇고,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문이 열린 것은 문이 닫히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프라하는 밤(어둠)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칼을 들고 있는 손의 의미는 문은 열려 있지만 거짓을 일삼는 자에게는 감히 넘볼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3개의 성문은 성삼위.  12개의 별자리는 12사도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은 100m에 육박한다. 화려한 고딕양식의 진수를 볼 수 있다.

 

 

 

 

 

 

 14세기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 황금 모자이크 벽화.

왕이 들어가는 이 문을 황금문이라고 한다 

 

 

 

성당후면

 

 

 

 

불타바강변의 댄싱하우스. 남녀가 함께 춤추는 건물 기존 건물 양식에서 탈피한 해체주의 작품

 

 

 

 

 

 

 

 

 

 

 

 

 

시내를 질주하는 삼성 전차(트램) 

 

 

 

 

 

 

 

 

 

 

 

 

 

중세 천주교의 폐해는 심각했다.  흑사병이 돌아 인구가 감소하고 물가는 상승한데다 모리비아 지역의 토지 80%가 성직자의 손에 있었고 면제부를 등 부정부폐까지 만연했다. 심지어는 미사때 서민에게는 빵만 제공하고 포도주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 공분을 샀다. 귀족과 성직자만 빵과 와인을 줬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한 성직자 얀 후스는 프라하 대학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성경에 있지 교회나 교황의 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설파했고  체코어로 된 성경을 출간하고 체코어로 미사를 바쳐 체코인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1415년 7월 6일 독일의 콘스탄츠에서 열린 종교회의에 불려나가 화형을 당하고 만다."만약 잘못을 인정하면 풀어주겠다."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기꺼이 화형대에 올라 죽음을 받아들였다. 

 

후스가 화형에 처하자 분개한 보헤미안 영주들과 농민들은 후스파를 조직해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며 시청으로 몰려가 13명의 시의원을 창으로 찔고 창문으로 내던진다. 이 사건으로 인해 15년간 신구교도간 후스전쟁이 이어졌는데 결국 후스파가 승리하여200년동안 체코는 종교의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제 2차 투척사건의 현장

 

이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게 되고 신성로마황제 루돌프 2세는 보헤미아에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황제 칙령을 발표하지만 얼마 후 그가 죽으면서 칙령은 무효화 되었다. 이에 반발한 신교도들은 프라하성으로 몰려가 황제가 임명한 2명의 공직자와 비서관을 창밖 15m에 던지는데 이 2차 투척사건이 유럽을 전쟁의 공포로 몰아 넣은 30년 전쟁의 시발점이 된다.  화가 난 합스부르크가는 용병까지 투입해 진압을 하게 되는데 당시 귀족, 군인, 농민 대표 등 27명을 구 시청광장에 참수시켜 화약탑에 10년간 걸어 놓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