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해미순교성지(聖地)
천주교 성지 해미순교성지 ( 海美殉敎聖地 )는
1866년(조선 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1882년(고종 19) 사이에 진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온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생매장당한 곳이다.
그래서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숨져간 '무명 순교자'가 가장 많은 곳이다.
갖고 기성전을 건하고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숫골이라는 이름의 시작은
당시 죽음을 앞둔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를 하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 소리를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들어 이곳을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해미순교탑
해미는 천주교 박해기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처형된 순교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라고 합니다.
특히 이 곳에서는 생매장 등 잔인한 방법으로 사형이 집행되기도 했습니다.
이들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서 생매장터인 여숫골(해미성지)에 해미 순교탑을 세워
신앙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들의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탑은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3개의 날개 형상이 십자가를 떠받치는 모습을 하고 있고 앞에는 미사를 봉헌하는 제대가 있고
제대 앞에는 순교자 탑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해미순교탑의 건립으로 부터 해미순교성지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합니다
노천성당
순교기념 전시관
그 벽면에는 140여 년 전 해미의 순교자들이 걸었던 생의 마지막 길의 모습이 새겨져다 있었
유해참배실
엮여진 모습으로 한티고개를 넘는 순교자님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거야"
첫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의 말씀
.
해미의 첫 순교자는 1800년 1월 9일에 장살형으로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 (프란체스코)다.
1791년(정조 15)에 일어난 신해박해때에 면천에서 체포된 박취득 (라우렌시오)가
해미 관아로 이송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처벌은 1800년을 전후로 시작되었다.
이후 한국의 첫 번째 신부인 김대건(안드레아) 의 증조부 김진후(비오)를 비롯하여,
덕산·당진·면천 등지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계속 순교하였다.
특히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동안에는 서산·해미 지역은 물론 홍주·예산·신창 등 내포 전역을 넘나들며
잡혀온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기록상으로 이 시기의 순교자만 무려 122명에 이른다고 한다고 한다.
관변 기록과 천주교 측 증언록들을 토대로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해미에서 처형된 순교자는 179명에 이른다.
하지만 무명 순교자의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성모자상
이름 없 는집
순례자들이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기 위하여
"성경 이어쓰기"를 하는 곳으로 누구나 참여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말 그대로 '이름없는 집'입니다.
2007년도에 건축된 약 7.5편의 초가집으로 순례자들이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순례공간이자 쉽터입니다.
이 곳에서는 누구든지 성경 이어쓰기에 참여할수있다고 하는데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예쁘게 다섯 절이상의 성경을 쓴 다음 날짜와 이름을 남기면 된 답니다.
쓰신 내용은 이곳 성지에 영구 보존된다고 합니다
진둠범
많은 숫자의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는데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한마디 명령으로 산사람들을 밀어넣어 흙과 자갈로 끌어 묻어버렸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해미 지역 외인들을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해서 죄인 둠벙이라 부르고 있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고 한다
순교 자리개 돌
길이가 4.2m인 너른 이바위가 자리갯돌이다. 피의 제사상 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돌은 해미읍성 서문밖 수구위에 놓여있던 돌다리로
병인박해때 신자들을 자리개질로 처형했던 사형도구다
참 잔인한 방법인데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렸다고 한다.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하였다고 한다.
해미읍성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 때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해 토성을 쌓으면서 시작됩니다.
성의 높이는 5m이고 둘레가 약 2Km에 이르는데 북쪽을 제외한 세 방향에 문이 나 있죠.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의 하나로
낙안읍성, 고창읍성과 함께 조선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또한 해미읍성은 천주교로서는 뼈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합니다.
이 곳에서 천주교 신자 1000여명 이상이 처형당한 곳이랍니다.
작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미읍성을 방문하기도 하여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 미사를 집전한곳입니다
해미읍성의 회화나무 일명 호야나무는 약 300년이 넘는 수령으로 병인박해때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메달아 고문을 했다고 전해진다고 합니다
지금도 밧줄자욱이 남아 있었습니다
해미순교자약사를 토대로 복원된 옥사는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옥사에 투옥하였다고 합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 법으로 규정해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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