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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성지(스페인.포르투칼)

기원전 고대도시 스페인 코르도바

고대도시 코르도바

코르도바는 기원전 2세기경에 건설되었습니다. 이후 이슬람 세력에 점령당하면서 5세기 동안 이슬람 문화가 짙게 깔리며 이슬람 도시로 전성기를 가집니다

10세기의 코르도바는 최고 전성기를 누리며

당시 인구100 만명에 달했으며 시내엔 1000여개의 이슬람 사원과수많은 궁전이 있었지만

13세기 그리스도인들의 국토회복운동에 의해 대부분 사라졌지만

이슬람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인상적이 도시 다.

 

전성기때의 코르도바는

의학, 천문학, 철학, 문학 등 온갖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구시가와 신시가를 연결하는 로마교

로마교는 전장 223m의 길이에 16개의 아치교각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다리이다.

 1세기 초 2000년전 로마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건립된 후

아랍통치시기에 보강이 이루어졌고 기독교시기에 재건된 것이다.

 

 

 

 14세기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요새  깔라오라 탑 

 

 

과달키비르 강가 의 수차

 

 안달루시아 지방을 관통하는 '과달키비르' 강

 

 

알까사르의 성벽과 수로

 

로마교 가운데 코르도바의 수호성인 성 라파엘상..

이 지역 사람들이 오며가며 촛불을 밝히고 기도한다

 

 

미나레트 (첨탑)

사원의 종탑은 코르도바에서 가장 높은 타워 이다.

오래된 이슬람 사원의 첨탑으로 이어지는 203개의 꾸불꾸불

한 계단은 54m 높이의 꼭대기로 이어져 있다

 

 

 

 코르도바시의 수호천사인 라파엘 기념답.   삼위일체의 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메스키타의 서쪽 성벽길, 또르리호스 길

 

 

뿌엔떼 문과 메스키타 사원

 

 

뿌엔떼 문

 한때 아랍 성벽의 일부분이었으나. 1571년 에르난 루이스 3세에 의해 재단장됨

 

 

 

 

첨탑처럼 높이 고개를 든 종려나무와 싸이프러스나무

 

회랑의 벽에는 개.보수시 나온 목재를 걸어 두었다. 목재에 새겨진 정교한 무늬가 눈길을 끈다.

 

 

오렌지 정원의 바닥 수로(水路)

 

 

오렌지 정원의 자갈바닥

 

오렌지 정원을 둘러싼 회랑

 

 

 

 

여기 가로수는 오랜지 나무인데

신기하게도 잘익은 오랜지와 지금 꽃이피고 있는 모습이 한 나무에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 이유인즉 이 오랜지는 식용이 아니고

관상용으로 쓰서 먹을 수 없기에 작년에 열린 열매를 관상용으로 그대로 둔단다

 

 

유대인 거리

 

 



 



유대인 거리를 비롯한  구시가 전체가 

'코로도바 역사지구' 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코르도바의 알카사르

   이 요새는 1328년 알폰소11세의 지시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원래는 호스텔로 지어졌으나 이후 왕궁으로 바뀌었고,

 수세기 후에는 종교재판본부, 군사감옥, 와인저장고, 시립창고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요새는 완전히 재건되었다. 

 

 

 

 

 

 

 

 

 

가톨릭 왕 부처와 콜럽버스가 알현하고 있는 동상..

 

 

 

 

코로도바 평원의 올리브 농장

 

 

 

 

스페인은 한 해 전세계  올리브 생산하는 1,600만 톤 중에서 50%인 800만 톤을 생산하는 대국이다.

 

'태양의 땅' 안달루시아는 어디든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동서남북에 올리브 나무로 뒤덮여 있다

 

 

 

코르도바의 올리브 나무 구글 위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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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고대도시 스페인 코르도바 


아람브라 궁전과 더불어 또 하나의 아랍문화가 남아 있는 꼬로도바로 간다.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 유산지로 지정될 만큼 의미 있는 도시다. 천년전 인구가 100만명에 달했을 정도로 번창하였던 곳이 이젠 약 30만명이 거주하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로 변해 있었다.

 이슬람 색채가 짙게 남아 있는 메스끼따와 알까사르, 하얀집의 유대인 지구와 좁은 골목길에 하얀 벽 그리고 예쁜 제라늄이 공간을 장식하고 있는 작은 꽃길을 거닐다 보면 여행이 무엇인지 왜 하는지를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주요 유적으로 1328년에 이슬람으로 부터 코로도바를 탈환한 알폰스 11세의 명으로 지어진 궁전인 알까사르가 있다. 이 곳은 15세기 국토 회복 운동의 거점으로 이슬람의 왕을 강금하였던 곳이며,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항해를 떠나기전에 왕을 알현한 곳이기도 하다.

 

원래 이슬람 사원이었던 메스끼타는1200년전 이곳을 지배했던 이슬람족의 신전인 모스크 였다.

 1523년에 기독교인들이 이 곳에 성당을 지으면서 이슬람교와 기독교 양식이 혼합된 성당이다. 알람브라 궁전의 아기 자기한 모습을 보다가 종려의 문을 들어 가면 숨이 멎을 정도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기둥들을 볼 수 있다.

붉은 색의 벽돌과 흰색의 벽돌을 교차하여 만들어 낸 내부 장식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묘한 아름다움이 가슴을 파고 든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인 코르도바는 이슬람인들이 만든 도시다.

710년경 기존 지배 세력이었던 서고트족의 분열로 손쉽게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의 우마이야 왕조가

자체 분열로 아바스 왕조로 바뀐다. 

얼마후 우마이야 왕조의 일원이었던 아브드 알 -라흐만 1세에 의해 756년 다시 우마이야 왕조를 재건하게 된다.

그는 아바스 왕조의 무자비한 학살을 피해 북아프리카를 떠돌며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힘을 키워 1000여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해협을 건어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반란과 폭동의 연속이었고,

지방토호들의 도전과 남아 있는 아바스족들의 거친 도전을 그의 독특한 정치로 헤쳐나갔다.

그는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는 동시에 종족과 부족의 경계를 초월해 모든 이슬람교도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제공하고 주변에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인정하여 그들의 경제, 문화, 학문을 받아들였다.

그 스스로 수 없이 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기는 과정에서 부족, 게급, 지위보다는 능력과 충성심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관용과 상호의존 정책으로 지역내 각각 다른 세력들을 인정하고 함게 공동체를 형성하는

'공존의 문명'으로 발전했다.

이렇게 한데는 코르도바 정권의 한계인 소수였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관용과 화합의 정치로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번영을 가져 왔고 그 상징으로 새로운 모스크를 세웠다.

그게 바로 메스키다이다.

그 안에서 그는 '사람에 대한 증오를 부추켜 부당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하자' 고 외쳤다.

그러나 역사는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도 관용보다는 불관용을 공존보다는 복종을 강요하다 멸망한 예를 기억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수준의 폭 넓은 관용은 아니었다.

차별은 분명 존재했고 상대를 인정하면서도 섞이기보다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댜. 

그러나 그때가 8세기 임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1200년이 지난 오늘날 인류는 여전히 불관용과 싸우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갖가지 이유를 들어 사람에 대한 증오를 부추키는 이들과 싸우고 있다. 

어쩌면 끝없는 싸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1200년전에 관용과 공존의 씨를 부렸던 당시 코르도바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역으로 가는 길은 라만차의 황량하게 펼쳐진 평원을 지나 코르도바에 이르자

가벼운 흥분과 함께 떨림 현사이 찾아 왔다.

단순히 남구의 푸광과 이국적인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떨리은 코르도바의 메스키다 사워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이 곳은 한대 이슬람 신전인 모스크였다.

오늘날에도 그 모습은 거의 유지하고 있다.

유럽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이슬람 성전 그 낯설으음은 강렬하다.

그러나 더욱 낯선것은 바로 이 공간을 중심으로 이뉴역사상 드뮬게 관용을 외친곳이기 대문이다.

관용의 주체는 이슬람 세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