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 아씨시 (Assisi)아씨시
스폴레토 계곡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 424미터로 1,290미터의 수바시오 산아래 언덕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씨시의 역사적 기원은 기원전 4세기 이래 움브리아 고대부족이
이 곳을 침략하여지배하였을 때
에투리아인들(현재의 토스카나 지방의 사람들)과 이 마을을 나눠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에투리아인들의 지배 시기 이후의 성벽들과 성 야고보 문 부근과 포르티카로,
시 첨탑 부근에일부 흔적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아씨시는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도시.
1642년에 흑사병이 이 도시를 휩쓸고 갔었으며, 1832-1833년에 큰 지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지진은 엄청난 피해를 가져와서 가옥들과 공공건물을 완전히 복구하는데 15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1569년에 착공 되었던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도 이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1808년에 나폴레옹에 의해서 성당의 예술품들이 큰 피해를 입었고,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소중한예술품들이 손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1997년 9월에는 대지진이 덮쳐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위층, 포르치운쿨라 대성당,
성녀 클라라 대성당과수녀원 등 아씨시 전역의 중요한 성지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씨시는 평화의 센터로서성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체취가 담긴 영적인 순례지로서 관광지로서
오늘도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아씨시는 12세기 프란시스코파를 창설한 "제2의 그리스도" 라고 까지
칭송되는 성인 프란치스코가 태어난 마을로 유명하며.
산프란체스코 성당은 2000년 세계문화유산 으로 등재된 이름다움과
중세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고
또한 종교에 관련 된것 뿐만아니라 성의 요세로서의 구조도 갖고있다
움브리아 평원에서 본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현재는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아름다운 이 성당은 스바지오산의 중턱으로 펼쳐지는 중세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 아씨시의 명물이다. 장미빛의 은은한 빛이 매우 아름다운 성프란치스코 성당은 엘리아 수사가 설계하여 건축하였는데 2층에 성당이 있는 것이 측징이고 청빈, 정결, 순명을 나타내는 지오또의 프레스코화가 아름답다. 이 프레스코화는 성인의 영성과 생애를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성당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와 유품인 떨어진 옷 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현재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본원이다.
수도원전경
성당 끝 부분 식스토 4세 광장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이 성당은 성 프란체스코 가 성인의 반열에 오른 후인 1228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하여 1253년에 교황으로부터 축성을 받았다.성당은 지하층, 하부성당, 상부성당으로 되어있으며, 지하층은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성 프란체스코의 무덤이 있다.
하부 성당은 낮으막한 천장으로 묵직하고 엄숙한 느낌이든다.이곳에는 치마부에( Chimabue)와 지오또(Giotto)등의 작품으로예수의 유녀시절과 공생활을 주제로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다. 상부성당은 하부 성당과달리 높다란 천정으로 되어 있으며 양쪽벽면은 지오토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 그림들은 성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28개의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체스코 " 라는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성당 앞 성 프란체스코 청동 기마상은 이탈리아 현대 조각가 프로이에티작품이며
작품명은 ' 프란체스코의 귀향 이다.
1202년 아씨시와 페루지아간의 전쟁이 일어나서 프란치스코가 기사로 전투에 참여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잡혀서 포로가 되어 페루지아에서1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1203년 가을에 아씨시와 페루지아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감옥생활을 마치고 아씨시로 돌아 옵니다. 감옥생활의 후유증으로 병상에 눕게 됩니다.
대성당 1층 문.왼쪽 문 가운데에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모습이 있습니다
지오토의 프레스코화
좌로부터 성인에 의한 한 신자의 치유, 죽음에서 소생한 한 여인의 고백, 참회하는 이교도의 석방
화려한 프레스코화가 성당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고뇌하는 성 프란체스코 像
상부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지오토의 28개 성프란체스코 생애를 그린 벽화이다..
좌측으로부터 경의를 표함 , 가난한 이에게 자신의 망토를 주는 성프란체스코, 궁전의 꿈이다.
'성 프란체스코가 교황 오노리우스 3세 앞에서 설교함' 작품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
1230년 4월 22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칙서로 성인의 유해를 모시게 됨으로써
이 성당이 전 형제회의 '머리요 어머니'가 될 것임을 선언했습니다.
현재의 무덤은 1925년에서 1932년 사이에 우고 타르키의 설계로 개조된 것이라고 합니다.
성 프란체스코 돌 무덤
성 프란체스코 무덤과 제대
성프란스시코 수도회 사람들의 기본 복장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3번 끈으로 묶어야 한다는 것.
태양의 노래를 형상화 한 모자이크 작품과 나무 십자가
성녀 클라라 대성당
현재는 글라라 성당 구내에는 검정수건을 내려쓴 글라라회 수녀의 모습이 순례자를 더욱 경건하게 해 준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날아다나는 새에게 까지 주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할 정도로 자연을 사랑했고, ‘형님이신 태양과 달님이신 자매'만물의 찬가'를 써서 이탈리아 문학사를 빛내기도 했다. 1228년 교황 그레고리 9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16년 가톨릭 액션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이 성당에는 글라라 성녀의 유해와 다미아노 십자가의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성녀 글라라 사후 4년인 1257년에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그 3년 후에 글라라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인상적인 것은 프란치스꼬 성인에게 말씀하신 독특한 모습의 십자고상, 프란치스꼬와 글라라 두분 성인이 입던 옷, 그리고 글라라 성녀의 시신이라 할 것이다. 대리석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성녀 글라라의 무덤이 있는데, 창살 사이로 보이는 글라라 성녀의 얼굴은 새까맣게 화석이 되어 있다. 700여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성녀 클라라 대성당 내부
성녀 글라라 유해가 안치된 지하 경당
성녀 클라라 유해 입니다.
1260년 10월 3일 지오르지오 성당 지하실에서 이 성당 중앙 제대 아래 석관에 안치되었다고 합니다.
1850년 9월 23일 8일간의 발굴작업으로 벌견되었다고 합니다. 키는 약 155cm 였다고
유물 보관소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유품입니다
성녀 글라라 께서 직접 만드신 프란치코 성인께 드리고자 만드신 옷들
성 다미아노 성당
성 다미아노 성당
다미아노 수도원은
처음에는 로마시대 순교한 성 다미아노의 십자가를 보관하였는데 후에 성 프란체스코가 수도원에서
기도를 할 때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허물어진 수도원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때 십자가를 '다미아노 십자가' 로 불리우며 클라라성당에 원본이 있다고 한다.
성 다미아노 성당 가는 길
다미아노 수도원은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를 하다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프란치스코야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음성을 듣고
돈을 마련하려고 폴리뇨로 가서 옷감을 팔았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을 고치라는 것으로 이해 했지만
당시의 부와 권력에 결탁하는 교회의 모습을 가난한 교회로 바꾸게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봉쇄 수도원 전경
성 다미아노 성당은 의사로서 순교한 고스마와 다미아노 성인에게 봉헌 되었고
9세기 또는 10세기 초에건축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성 다미아노 성당
다미아노 성전 제대
그 당시의 글라라 수녀께서 기도하신 방의 실체
글라라 성녀께서 운명하신 자리
해 시계 (글라라 성녀께서 기도 방에서 바라볼수 있게 그려진 것이라 한다.)
다미아노 십자가를 들고 있는 성녀 클라라의 이콘입니다.
성체의 기적으로 사라센인들을 물리친 것을 표현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1240년 9월에 성녀 클라라와 두 자매들이 성체를 모셔와서 기도를 해서
사라센인들로부터 수녀원과 아씨시를 구했다고 합니다.
성녀 클라라와 성 프란치스코 그림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
성당안에 또 다른 성당이 들어서 있는 곳. 성 프란체스코가 어려운 시절 머무르던 포르치운콜라라는 작은 성당이 있는데, 이 성당을 허물지 않고 그 위에 더 큰 규모로 지금의 성당을 세웠다. 포르치운콜라 뒤에 있는 소 성당은 프란체스코 성인이 생을 마감한 장소이다.성당안에는 " 아씨시의 기적 " 기적이라는 신비한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첫번째가 가시없는 장미로 성 프란체스코가 욕망을 이기기 위해서 장미 가시덤불 속으로 몸을 던진후 가시가 없는 장미가 자란다고한다. 실제로 가시없는 장미를 볼 수있다.또 하나는 순백색의 비둘기 한쌍인데 벌써 700년째 대를 이어가며 성 프란체스코 조각상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형제들과 수도 생활을 시작한 초기 손수 보수하고 기거한
뽀르찌웅 꼴라 경당
가시없는 장미꽃 정원
프란치스코 성인이 골방에서 기도하던 중
심한 육체적 유혹을 받게 되자 골방 옆에 있는 장미 가시덤불에서 알몸으로 뒹굴었다는 바로 그 정원...
그 정원에서 피어나 있는 장미들은 가시가 없다.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장미가 가시가 보이지 않는다.
가시가 있었던 흔적조차 없이 매끈한 장미줄기...
그러나 이 장미를 다른 꽃으로 옮겨 심으면 다시 가시가 난다고 한다
성녀 클라라 상
(주님의 성체로 아씨시에 침입한 사라센 군을 물리친 글라라 수녀 성인의 상)
움브리아 평원을 내려다 보는 곳에 앉아서 묵상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상
프란치스코 성인이 정원에서의 일보는 모습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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